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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11. 2019

어느 직장맘의 사직서

[엄마의 퇴사15] 나는 떠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이 글은 제가 실제로 퇴사할 때 제출했던 사직서입니다.



직장맘으로 산다는 건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다. 육아는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이제 좀 키울 만하다 싶으면 어디선가 변수가 나타나 뒤통수를 탁 친다. '애 키우는 게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았어?' 하고.


'죄송해요, 애 때문에...' 부서장에게 메시지를 보내 양해를 구할 때면 자괴감과 무력감이 밀려온다. 당장 내일 출근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한 직원이라니,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한편으로는 애가 아픈 게 내 탓은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맨날 죄송하고 고마워야 할까 억울하기도 하다.


어차피 하루에도 수십 번씩 퇴사를 고민하는데 이참에 확 그만둘까 싶다가도 이렇게 나가고 싶지 않다는 오기가 생긴다. 적어도 아이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거봐,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 힘들어서 그만뒀잖아"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그럼 아이를 원망하게 될까 봐.




아이라는 변수


아이를 낳기 전, 직장맘 선배들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떠올랐다(이미지 출처 : unsplash)


8년 전. 3개월간의 수습기간이 끝날 때쯤. 부서에 있던 유일한 여자 선배가 퇴사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선배의 환송회 날, 나와 여자 동기는 술에 취해 오열했다. 3개월간 정이 많이 들어서? 그럴 리가. 말 한마디 제대로 섞어본 적 없는 사인데.


주로 현장을 뛰는 외근 부서에는 여자 선배가 몇 없었다. (그때만 해도) 여자 자체가 그리 많지 않은 직군이기도 했고. 그런 상황에서 롤모델이 될 수 있는 선배가 떠난다는 게 막막했다. 허허벌판에 버려진 가여운 어린양이 된 심정이랄까.


몇 년 후 나도 현장을 떠나 내근직으로 옮기게 됐다. 내가 여자라서는 아니었다. 업무가 맞지 않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결혼하니까 내근직으로 가는구나’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그래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에는 내근직 만한 데가 없지.’ 아이를 낳고 나서야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바뀐 업무에 만족하면서도 늘 여자 후배들에게 미안했다. 육아 휴직이 끝나고 복직하고 나서는 더욱 그랬다. 나름 업무에 최선을 다해 충실하고자 했지만 늘 ‘2등 직원’이 된 기분이었다(그 전에도 1등은 아니었지만^^).


퇴근 시간이 되면 뒤도 안 돌아보고 회사를 나서야 했고 회식이나 MT는 상상도 못 했다. 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늘 시간이 없었다. 으쌰 으쌰 호기롭게 일을 벌였다가도 아이에게 일이 생기면 바로 올 스톱.  


‘믿을 수 없는 사람, 불안정한 사람. 저렇게까지 힘들게 회사를 다녀야 할까...’ 아이를 낳기 전, 직장맘 선배들을 바라보던 내 시선이 떠올랐다. 아마 여자 후배들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을지 모른다. 내 모습이 바로 본인들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며 불안해하면서.

 



나만 죽도록 버티면 되는 걸까


나는 떠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이미지 출처 : unsplash)


아이가 둘인 한 직장맘 후배는 말했다. 그래도 어떻게든 회사에서 버텨서 중요한 의사결정권을 가진 자리까지 올라가고 싶다고, 그래야 후배들에게도 롤모델이 되고 조직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세 돌만 지나도 괜찮아져, 다섯 돌만 지나도 괜찮을 거야.” 직장맘 선배들은 말했다. 아이가 엄마를 필요로 하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고. 그때가 됐을 때 엄마가 일을 가지고 있어야 엄마도 아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티라고.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내게는 지금 이 순간도 중요하다. 몸도 마음도 지쳐서 병원과 약을 달고 살고. 이렇게 사는 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번번이 회의하게 되는데. 내 안의 소중한 것이 망가지는 걸 매일매일 목도하는데. 그럼에도 버티기만 하는 게 옳은 걸까. 이러다 내가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닐까.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버텨내는 것이 일과 육아를 도저히 함께 할 수 있는 부당한 체제에 투항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이렇게 꾸역꾸역 버텨서 내게 남는 건 뭐가 있을까. 일과 가정의 양립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나 혼자만 죽도록 노력하면 되는 걸까.


그보다는 기존 체제를 거부하고 새로운 롤모델을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적어도 후배들은 나보다 나은 환경에서 일과 육아를 함께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일과 육아에 지쳐 그렇고 그렇게 스러져한 또 한 명의 여성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버티기만 하는 것도 해답은 아닌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삶의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을까.


퇴사를 하면 답이 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렇게 그저 버티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건 알겠다. 그래서 나는 떠난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서.



[엄마의 퇴사 16]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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