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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l 31. 2021

휴가 가서 계속 일하는 사람

정신력만으로는 쉴 수 없다

아이와 단 둘이 KTX에 올랐다. 일 년에 두 번, 아이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면 부산 친정에서 일주일씩 보내다 온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3시간 조금 안 되는 시간, 기차 안을 종횡무진 누비고 다니던 아이는 처음으로 한 번도 영상을 보지 않았고 차 안에서 돌아다니지도 않았다. 다섯 돌이 지나니 이런 날이 온다.


부산에서의 하루는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오늘의 코스를 정한다. 하루는 시골 할머니 집, 하루는 국립 부산 박물관, 하루는 다대포 해수욕장. 하루 종일 아이와 밖에서 놀다 집에 들어와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고 스마트폰으로 책과 영화를 보다 까무룩 잠드는 날들. 이렇게 육아와 쉼에만 집중하는 게 얼마만인지. 머릿속에는 이런저런 미래의 걱정과 계획이 떠오르지만 빠져 들지 않고 흘려보내려 한다. 지금은 방학이니까.



2주 휴가의 악몽


캠핑장의 밤. 남편도 일하는 중@홍밀밀


위기는 있었다. 얼마 전, 일-육아 양립에 대한 토론회 패널 제안을 받았다. 날짜를 보니 아이 방학 기간이었다. 토론회 패널이라니. 왠지 부담스러운 마음 한편에는 그래도 목소리를 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목소리를 내야 누구든 알아준다고, 그래야 세상도 조금씩 바뀐다고 계속 이야기해 온 건 나였으니까.


부산 가는 일정을 조정할까 하다 물리적으로 참석이 어렵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다음날, 주최 측에서는 코로나19 상황이 심각해지면서 온라인으로 참석해도 괜찮다고, 꼭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거듭 요청하는 이메일을 보냈다. 고민됐다. 지난 휴가의 악몽이 떠올랐다.


2주간 제주에 다녀왔다. 2주 휴가라니. 다들 너무 좋겠다 했지만 첫 주는 창고살롱 마지막 주라 밤낮으로 몇 차례 살롱이 있었다. 기고 글 마감, 외주 업무 온라인 미팅도 있었다. 둘째 주는 온라인 컨퍼런스 발표가 있었다. 15분 발표라 가볍게 생각했는데 준비 시간을 간과했다. 하루는 장표 준비하느라 꼬박 밤을 새고, 발표 전날에는 숲 속 캠핑장 텐트에서 발표 준비를 하고 또 했다. 내가 이걸 왜 한다고 했을까, 이럴 줄 몰랐던 것도 아닌데. 과거의 나를 원망했다.


상반기 내내 번아웃이 반복되면서 업무 일정 중간중간 노는 시간, 쉬는 시간을 부러 만들었다. 일의 양은 그대로인데 쉬는 시간을 만드니 쉬기 위해 무리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등산을 가기로 한 어느 날, 새벽 2시까지 글을 마감하고 비몽사몽 산에 올랐다. 졸리고 피곤했다. 아직 남아 있는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었다. 제대로 쉬지 못하니 억울함과 피로도 차곡차곡 쌓였다.


제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이건 쉬는 것도 일하는 것도 아니었다. 여행까지 와서 일을 붙들고 있는 엄마와 아내라 가족들에게 미안하고, 나의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쉴 때는 일 생각하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쉬는 건 정신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일하는 시간에 쉬는 시간을 욱여넣는 게 아니라 쉴 수 있는 환경과 상황을 전략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누구를 원망하겠나. 해야 할 일이 있는데 휴가를 낸 것도, 휴가 기간에 일을 만든 것도 모두 나였다. 그 와중에 일감을 또 받았다. 기고 글을 보고 들어온 또 다른 기고 요청을 수락했다. 어제의 나를 원망하며 준비한 발표는 끝나고 나니 좋은 경험이 되었다. 역시 무리해서라도 하길 잘한 건가.



쉬고 싶다면서 왜 일을 벌이지


낭만적인 디지털 노마드는 잠깐@홍밀밀


이쯤 되니 대체 나란 사람이 뭔지 나조차 헷갈렸다. 왜 나는 쉬고 싶다고 하면서 일을 줄이기는커녕 계속 일을 벌이는 걸까. 혹시 인정 욕구가 너무 강해서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고 필요하다고 하면 금세 마음이 흔들리는 게 아닐까. 잠시라도 멈추면 영영 멈추게 될까 봐 쉬는 게 두려운 건 아닐까. 그런데 나는 무엇을 쉬고 싶은 거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쉬고 싶은 걸까. 그저 도망갈 곳을 찾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진짜 쉬고 싶은 건 맞는 걸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연료가 바닥나버렸다는 것. 잠깐은 화르르 타오를지 몰라도 오래가지는 못하리라는 걸. 뭐가 문제일까. 어떻게 해야 할까. 글로 세상을 배우는 사람답게 번아웃에 대한 책을 e북으로 구입해 텐트에서 읽었다. 제목은 <내가 뭘 했다고 번아웃일까요>(안주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저자는 병원을 찾은 환자들이 자주 하는 말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는 피로하다고 말하는 데에도 자격을 요구”한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지치고 피곤하고 힘들어하는 데 자격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그냥 내가 느끼기에 힘들고 괴로우면 번아웃이에요.”


책에는 번아웃의 한 원인으로 경험자아와 관찰자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다만 자아 성찰은 어떤 일이 끝나고 몰입에서 빠져나온 후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스스로를 감시하는 CCTV가 되어 실시간 자기검열을 하면 문제가 됩니다. 이런 검열이 오래 지속되거나 과도해지면 시시각각 시험을 보고 있다고 느끼게 됩니다. 매일 나를 평가하는 심사위원이 있는데, 그 심사위원이 바로 나 자신인 거예요. 도저히 떼어버릴 수가 없죠.”


내가 나를 평가하는 심사위원, 바로 내 이야기였다. 저자는 말한다. 관찰 자아를 과도하게 쓰면 경험 자아에 쓸 힘이 부족해진다고. 경험 자체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 상황을 겪고 있는 나를 자꾸만 관찰하고 평가하며 자기 검열하게 된다는 거다. 책 내용을 남편에게 읽어주며 말했다. “이거 봐. 그래서 내가 힘든 거였어.”


이야기를 듣던 남편은 말했다.


“그걸 또 책을 읽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책 좀 그만 봐.”




실시간 자기 검열


나는 아무 생각이 없다@홍밀밀


휴가가 끝날 때 즈음, 제주에서 전 직장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와 단 둘이 제주살이를 하러 왔다. ‘마더티브’를 함께 창간한 선배는 <엄마는 누가 돌봐주죠> 출간과 함께 마더티브 1기 활동을 마쳤다. 6살 동갑내기 아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나게 물놀이를 했다. 우도 해변에 앉아 선배와 이야기를 나눴다. 선배는 하는 일은 어떻냐고 물었고 나는 솔직히 답했다. 많이 지친 것 같다고.


선배는 2주 동안 휴가라길래 쉬는구나 했는데 스케줄 듣고 깜짝 놀랐다고, 쉬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그게 더 힘들 텐데 걱정했다고 말했다. 그런 상황이 뭔지. 선배도 잘 아니까.


쉬고 싶을 때 쉬지 못하는 건 개인 욕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뭘 했다고…>에 따르면 2015년 한국 직장인을 대상으로 번아웃 진단 검사를 한 결과, 번아웃 위험군에 해당하는 점수가 이미 우리나라 직장인 평균이었다고 한다. 성과 내지 못하고 인정 받지 못하면 도태되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 사는 사회. 쉼은 애써 사수해야 할 무언가가 되어버렸다. 엄마가 되고서는 더욱더.


선배는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 보겠냐고.


“너도 많이 달렸잖아. 벌써 몇 년째야. 가끔은 쉬어가는 것도 필요해.”


선배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게. 나 정말 계속 달렸구나.


“저도 목소리를 보태면 좋겠지만 코로나19 상황도 영 심상치 않고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아이에게 좀 더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는 판단이 들어서 토론회 패널 참석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주최 측에 이메일을 보냈다. 홀가분과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이번 휴가는 정말로 쉬고 싶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인스타그램과 슬랙 앱부터 삭제했다. 부산에 오면 꼭 만나던 친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어제는 남편이 서울에서 왔다. 남편 손에는 지난번 제주에서 받았던 일감의 결과물이 들려 있었다. 이걸 내가  한다고 했을까 끙끙대며  글인데 종이 잡지에 인쇄되어 나오니 근사했다. 역시, 무리해서라도 하길 잘한 걸까, 이것도  인정 욕구인가 생각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놈의 실시간 자기 검열.


내 안의 수많은 모순들. 일을 벌이고 싶은 마음도, 쉬어가고 싶은 마음도 모두 내 마음이라는 걸 인정하기로 한다. 다만 내게 너무 가혹해지지는 않기로 한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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