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Dec 29. 2021

내 마음을 깨뜨리지 말아 줘

욕심을 내면 파국

이번 겨울 방학에는 친정에 안 갔다. 아빠가 허리 디스크 수술을 받고 집에 있는 상황이라 나와 아이까지 가면 엄마에게 짐이 될 것 같았다. 연말에는 시할머니 첫 번째 기일이라 시가에 가야 하니까 적어도 3일 정도는 아이를 혼자 봐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남편은 겨울이라 제일 바쁜 시기였다. 아이가 6살인데도 독박 육아는 늘 두렵다. 이제 육아는 잘 먹이고 잘 재우는 영역을 넘어 고차 방정식으로 접어들었다. 아이는 끊임없이 “엄마, 나 심심해”“엄마 우리 뭐 해?”를 외치며 놀거리를 찾는다. 여름에는 물놀이라도 하지 겨울에는 뭐하지? 월요일에 일을 마무리해놓고 야심 차게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래, 아이랑 매일 전시회를 가는 거야!


첫날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내맘쏙 모두의 그림책전’에 가기로 했다. 아이와 전시회 상세페이지를 함께 봤다. 한국 그림책 작가 7명의 그림책 원화를 볼 수 있고 체험 활동도 있다니 아이랑 가기에 딱이었다. 아이는 이지은 작가의 <이파라파 냐무냐무>를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우리 그림책 만들까?” 아이는 집에 있는 빳빳한 달력을 잘라서 테이프로 이어 붙인 다음 <이파라파 냐무냐무>에 있는 그림을 따라 그렸다. 글자는 내가 써줬다. “내일 이거 들고 전시회에 가서 사진 찍을 거야!” 아이는 기대에 잔뜩 부풀었다.


집에서 예술의 전당까지는 1시간이 넘게 걸렸다.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서 30분 넘게 지하철을 타고 또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아이와 지하철을 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생각해 보니 2년 가까이 재택근무로 집에만 있으면서 이렇게 오래 대중교통을 탄 것도 오랜만이었다. 겨울이 되면서 안구 건조증이 심해져서 밖에 나가기만 해도 눈이 뻑뻑하고 침침했다. 피로가 몰려왔다. 아이와 끝말잇기를 하며 전시관에 도착했다.


방학이라 나처럼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 아빠가 많았다. 다행히 그렇게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인스타에 연재한 <4기병> 덕분에 이름을 알고 있는 고 윤지회 작가의 <우주로 간 김땅콩>이 제일 앞에 있었다. 윤지회 작가가 이런 그림책을 그렸구나. 하나하나 감상하면서 이동하려 하는데 그렇게 될 리가 없지. 아이는 대각선으로 작품을 휙휙 뛰어넘었다. 우리 아이만 그런 건 아닌지 “이걸 봐야 그다음이 이해 가는 거야”라고 말하는 엄마를 몇이나 봤다. 15분. 정확히 15분 만에 아이는 전시관을 나왔다.


순삭 15분


허무했다. 이거 보려고 어젯밤부터 검색하고 예매하고 아침부터 지하철 타고 버스 타고 지금 눈도 너무 뻑뻑하고 피곤하고. 전시관을 나가면서 아이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날날아. 이거 지금 나오면 다시 못 봐.” 아이는 해맑게 말했다. “응. 다음에 또 돈 내고 예매하면 볼 수 있는 거지?” 2만 3천 원이나 주고 온 건데 내가 애를 너무 호화롭게 키웠나.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는 들어오는 길에 지하 1층 어린이 라운지에서 봤던 미끄럼틀을 타고 싶어서 마음이 급하다. 그래. 미끄럼틀이나 타라. 자포자기 심정으로 QR을 찍고 열 체크를 하고 표를 끊으려는데 아이가 갑자기 “나 그냥 안 가면 안 돼?” 조심스럽게 말한다. 아. 화가 난다. 눈은 아프고 배도 고프고 커피 생각이 간절하다. 결국 폭발.  


“아! 제대로 말을 해!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이는 들어가기 싫다고 한다. 나중에 물어보니 아이는 어린이 라운지 안에서 미술 수업이 열리는 걸 보고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자신이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남들 앞에서 그림 그리는 걸 부끄러워한다. ‘친구들이 잘 못 그렸다고 놀리면 어쩌지?’ 아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식당에 가는데 아이가 말한다.


“안에 낯선 선생님이 미술 가르치는데… 나는 부끄러워. 나는 미끄럼틀만 타고 싶은데 그림 배우는 건 싫어.”

“저기 봐. 다른 친구들은 그래도 배우는데? 못 그려도 괜찮아.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없어.”

“엄마, 나 이건 알아. 모든 건 점에서 시작하는 거야. 나 집에서 그림 연습할 거야. 용기 생기면 다음에 수업받을래. 그러니까 내 마음을 깨뜨리지 말아 줘.”

“엄마가 날날이 마음 깨뜨렸어?”

“응. 엄마가 막 화냈잖아. 내 마음이 깨졌어.”


마음이 깨졌다는 아이의 말을 듣는데 아차 싶었다. 내가 또 욕심을 냈구나.


나는 왜 화가 났을까. 비록 15분이기는 했지만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전시회를 즐겼다. 어제 만든 <이파라파 냐무냐무> 책을 들고 거대한 털숭숭이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나는 그걸로 충분치 않았다. 그럼 나는  원했을까. 전시회에   아이와 자주 문화 생활을 즐기는  엄마의 인스타 포스팅 때문이었다. 나도 전시회를 그냥 보는  아니라 본전을 뽑을 정도로  보고 싶었다. 아이와 함께 작품을 찬찬히 감상하고 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눴고 이런 영감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멋진 엄마라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럼 여기까지 힘들게  보람이 있을  같았다. 애초에 전시회를 보러 오자고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지금  모습은 아이가 원한 적도 없는 선물을 들이밀어놓고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기뻐하고 고마워하지 않냐고 화내는 꼴이었다. 선물 준비하느라 얼마나 애썼는데 억울해하면서 말이다. 육아는  이렇다. 욕심을 내면 파국이다.


풀이 죽어있는 아이에게 말했다. 우리 맛있는 밥 먹고, 아까 보니까 전시관 옆에 그림책 볼 수 있는 공간 있던데 거기 가서 날날이가 보고 싶은 책 보자고. 그리고 집에 가는 길에는 서점에 들러서 만들기 재료도 사자고. 아이가 좋아하는 라비올리를 먹고 아이가 좋아하는 서현 작가의 <호라이호라이>와 <간질간질>을 깔깔대며 읽었다. 옆에 있는 아트숍에 가서 엽서도 샀다. 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또다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서점에 들렀다 집에 왔다.


저녁 식사를 하며 아이에게 물었다. 오늘 전시회에서 뭐가 제일 좋았냐고. 아이는 말했다.


“전시회 다! 다! 엄마랑 책 읽은 거랑 엽서산 거. 지하철도 타고 버스도 타고. 오면서 서점 간 것도.”


또 아차 싶었다. 나의 오늘 하루 목적은 ‘전시회 가기’였는데 아이에게는 전시회에 갔다 오는 그 모든 과정이 다 좋았구나. 아이의 세계는 나보다 크다.



p.s 알고 보니 미술 수업은 어차피 미리 신청을 해야 들을 수 있는 거였다. 그냥 카운터에 물어볼 걸. 소심한 INFP는 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한 가지 마음만 생길 땐 어떡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