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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02. 2019

애 때문에 시어머니와 같이 산다는 것

[엄마의 퇴사5] 믿을 건 결국 가족뿐이라는 슬픈 말

아이를 낳기 전, 부산에 사는 친정엄마가 나중에 서울에 와서 아이를 봐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괜찮다고, 내가 어떻게든 알아서 하겠다고. 실제로 친정엄마가 아이를 봐준다는 친구들 이야기를 들을 때면 속으로 혀를 찼다.

 

"부모가 무슨 죄야. 지금까지 키워줬는데 손자까지 봐줘야 하는 거야?"
 


대학 입학 후 10년 넘는 시간을 가족과 떨어져 살았다. 그 사이 우리는 가치관도 생활방식도 너무 많이 달라졌다. 나는 내 공간과 내 시간이 중요한 사람이다. 가장 가까운 존재인 남편과 아이와 함께 있어도 늘 '자기만의 방'을 갈구한다. 이제 와서 엄마랑 같이 산다고? 상상이 안 갔다. 결혼을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 이제 가족으로부터 진짜 독립해 어른이 되어야 한다. 나는 출산이 그 시작이 될 줄 알았다.


  



믿을 건 가족뿐


애 때문에 시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영화 <B급 며느리 스틸컷>(출처 : 영화연구소)


복직 한 달째 되던 날, 목을 움직일 수 없어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이전부터 고질병이었던 목 디스크 증상이 재발한 것이다. 하루 종일 앉아서 컴퓨터로 일하고 퇴근 후에는 에너지 넘치는 아이와 씨름하다 보니 목과 어깨가 늘 뻐근했다. 아프고 서러웠다.  


어느새 나는 친정엄마와 시어머니를 떠올리고 있었다. 도우미도 고려했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에게 어린 아이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건 가족뿐. 함께 산다면 아무래도 친정엄마가 더 편하겠지만 친정엄마는 생계 때문에 당장 올 수 있는 여건이 안 됐다. 서울과 부산은 너무 멀었다.  


시어머니가 감사하게도 먼저 말을 꺼내줬다. 정 힘들면 본인이 서울에 오겠다고. 다만 본가 살림도 챙겨야 하기 때문에 월요일 우리 집에 왔다가 금요일 원주에 가는 식으로 주5일 근무를 하겠다고 했다.


훗날 그때를 떠올리며 남편은 말했다. 아마 북한 김정은이 애를 봐준다고 해도 손을 덥석 잡았을 거라고. 당시에는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시어머니와의 동거를 결정했다.


고민이 없지는 않았다. 친정엄마와도 같이 살 자신이 없는데 시어머니랑 같이 살 수 있을까. 아이만 생각한다면 무조건 시어머니가 오는 게 맞다. 성심성의를 다해 아이를 돌보는 분이니까. 아픈 아이를 억지로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아도 되고, 아이는 어린이집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지 않아도 된다. 나도 남편도 시어머니가 온다면 삶에 여유가 생길 거다. 일주일에 한번은 저녁에 운동도 하고 강연도 듣고 친구도 만나고. 지금처럼 아등바등 하며 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머릿속엔 하나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우리의 삶을 유지한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시어머니는 30년 넘게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는 '며느리 살이'를 하게 생겼다.


시어머니는 평일에는 아들, 며느리, 손자를 돌보고 주말에는 팔순의 시어머니와 남편 그리고 딸을 보살펴야 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봄 노동의 쳇바퀴. 거기에 내가 빨대 하나를 더 꽂는 거다. 그토록 가족주의를 비판해왔던 내가. 그럼에도 시어머니 이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내 새끼


<이상한 정상가족> 책 표지(출처 : 동아시아)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김희경은 질문한다. 서구에서는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개인'이 중요해지는 반면, 한국에서는 왜 가족이 지나치게 중요해졌을까.


"한국 사회의 특이한 점은 흔히들 가족주의가 약해지기 마련인 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더 강력해졌다는 점이다. 근대화 과정 내내 국가가 '선 성장, 후 분배'의 논리 하에 거의 모든 사회 문제를 가족에게 떠넘겼기 때문이다. 사람을 먹이고, 키우고, 보호하고, 가르치고, 치료해주고, 부축해주는 그 모든 일들이 전부 가족의 책임이었다." <이상한 정상가족> p.166


김희경은 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한 한국 사회에서 개인이 기댈 유일한 언덕은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었다고 지적한다. 육아도 마찬가지다. 여성의 사회 진출로 엄마도 아빠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지만, 지금까지 엄마의 영역이었던 돌봄에 대한 공적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믿을 건 가족뿐이다. 수많은 부모가 조부모에게 아이를 맡긴다. 조부모는 자식이 건넨 저임금으로 노후를 살아간다. 돌봄을 온전히 가족이 책임져야 하는 사회에서 가족은 똘똘 뭉친 ‘원팀'이 되어 살아남아야 한다. 각자도생이다.


가족의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이들은 자연스레 경쟁에서 도태된다. '일과 육아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다 주로 임금이 적은 여성이 일을 그만둔다, 경력단절 여성이 된다, 남성은 가사와 육아에서 더욱 멀어진다.'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다.


시어머니는 서울에 오겠다고 결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새낀데, 내가 챙겨야지."
 


김희경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똘똘 뭉쳐 분투했던 가족의 중심에 늘 '헌신적 어머니'가 있었다는 것도 한국 가족주의의 특징 중 하나"라고 설명한다. 이 문장에 밑줄을 그으며 나는 시어머니를 떠올렸다. 원정육아 1년 만에 우울증과 당뇨를 얻었다는 친구 어머니를 생각했다. 노후를 잃어버린 수많은 엄마들을.


고민 끝에 우리는 시어머니와의 동거를 포기했다. 여러 사정이 있었지만 서른 넘은 아들과 며느리, 예순이 다 되어가는 시어머니가 오로지 아이 때문에 함께 산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육아는 남편과 나 그리고 아이, 세 사람의 일이었다. 어떻게든 둘이서 해보자고 했다.


육아 때문에 가족의 도움을 받는 친구들은 말한다. 여유는 좀 생길지 몰라도 늘 엄마에게 눈치가 보인다고. 죄인 된 심정이라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그래도 잠시라도 기댈 곳 있는 이들을 나는 부러워했다. 안 되는 걸 달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내 처지를 비관했다. 죄없는 부모를 원망하기도 했다.  


그 후 우리에게는 수많은 시련이 있었고 결국 나는 회사를 그만뒀다. 가끔씩 생각한다. 그때 내가 시어머니를 불렀어야 했을까. 친정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시터라도 썼어야 할까.  


여전히 대답은 그때와 같다. 나는 우리 힘으로 아이를 키우고 싶다. 남편과 나 두 사람의 힘으로 아이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그게 불가능한 꿈이라 해도.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https://brunch.co.kr/@hongmilmil/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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