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퇴사6] 아이를 낳고서야 알게 됐다, 내가 속물이라는 걸
시부모님에게 아이를 잠시 맡기고 남편과 영화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나온 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일본식 선술집에 앉아 하이볼을 마시며 “이렇게 사는 건 분명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늘 정신이 없었고 늘 피곤했다. 늘 시간이 부족했고, 그 부족한 시간을 돈으로 때우고 있었다. 집에서 밥 지어 먹은 지가 언젠지 까마득했다. 너무 힘들고 지치면 호텔을 찾거나 여행을 떠났다. 일은 많이 하는데 정작 남는 돈은 없었다.
아이와 가장 많이 가는 공간은 대형 쇼핑몰. 차 걱정 없이 뛰어놀 수 있고, 볼거리도 많고, 무엇보다 밥 먹을 때 눈치를 덜 봐도 됐다. ‘맘충’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사회에서 아이와 부모는 소비자가 됐을 때야 비로소 대우를 받는다.
주말이면 아이들로 북적이는 쇼핑몰을 보면 씁쓸해진다. ‘이 수많은 아이들의 유년 시절에는 골목이 아니라 쇼핑몰이 있겠구나...’ 돈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만 같아서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노는 공간조차도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하는 세상이라니, 내가 이러려고 아이를 낳았나 싶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면서 흥미로웠던 건 김태리의 '쓸모'였다. 도시에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인력이었던 김태리는 시골에서 정말 다양한 일을 해내며 살아간다. 땀 흘려 논밭을 일구고, 직접 수확한 농작물로 창의성 넘치는 요리를 한다. 직접 집을 고치기도 한다. 생기가 넘친다.
이반 일리치가 쓴 책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지금 내가 가난한 것은 로스앤젤레스에 살면서 35층 고층건물에서 일하느라 두 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반 일리치는 현대화와 함께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주목한다. 그는 우리가 자급자족 사회와 비교했을 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을지 몰라도 실질적으로는 더 가난해졌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며 살았던 인간은 이제 상품의 소비를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게 됐다. 그 상품이 정말로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p.6
영화에서 김태리는 배가 고파서 서울을 떠나왔다고 말한다. 그녀가 시골에 돌아가지 않았다면 자신의 쓸모를 알 수 있었을까. 삶의 풍요로움을 경험할 수 있었을까. 시골에서 삶의 능력을 되찾은 김태리는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질문은 내게로 돌아온다. 내게도 내가 몰랐던 쓸모가 있지 않을까.
새로운 쓸모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삶의 전환이 필요했다. 적어도 마흔 이후에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내 나이 서른 중반,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막 두 돌 지난 아이를 둔 엄마였다. 회사 일과 육아를 해내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다른 삶의 가능성을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영화에서 김태리는 기억 속 엄마(문소리 분)의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만든다. 엄마가 만들었던 음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만드는 과정을 통해 엄마를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도 치유 받는다.
영화를 보며 생각했다. 나와 남편의 모습은 아이에게 어떻게 기억될까. 집도 재산도 없는 우리가 아이에게 물려줄 건 결국 삶의 태도일 텐데. 우리는 아이에게 무엇을 남겨줄 수 있을까. 우리에게 변화가 필요한 건 아이 때문이기도 했다.
한동안 서울을 벗어나 살 곳을 찾아보겠다며 세 식구가 주말마다 여행을 떠났다. 이왕이면 강원도가 낫겠지. 바다도 있고 산도 있으니. 강릉은 너무 붐비니까 동해가 나을까, 삼척은 어떨까.
그러나 이곳에 우리가 산다면 어떨까, 대입해 보면 막상 자신이 없었다. 남편도 나도 평생을 대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더구나 지금 살고 있는 곳은 번화가라 집에서 조금만 걸어가도 카페와 맛집과 서점이 있다. 설령 거짓된 풍요라 할지라도. 이 모든 편리함을 버릴 수 있을까. 먹고 사는 문제는 어쩌고. 그곳에서 아이를 어떻게 키우며 살지도 고민해야 했다.
언제든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회사든, 서울이든, 한국이든 마음만 먹으면 훌쩍 떠날 수 있다고. 욕심을 버리고 덜 벌고 덜 소비하며 살아가면 된다고.
아이를 낳고서야 나는 알게 됐다. 내가 생각보다 훨씬 속물이라는 걸. 더 크고 좋은 집에 살고 싶고, 남부럽지 않게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다. 나는 이미 물질적 풍요에 길들여져 있었다.
“가격표가 붙지 않는 거래는 모조리 무시하는 산업사회는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도시의 풍경을 만들었다. 매일매일 자신의 몸을 자동차와 전철에 가두고 자기 몸을 스스로 갉아먹지 않으면 적응할 수 없는 곳이 이 도시의 풍경이다. 이곳에서는 날마다 쏟아지는 물건과 명령이 내가 원치 않는 결과를 만들고, 그때마다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차별과 무기력, 절망의 골이 더 깊어지는 세계이다.”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p.27
이렇게 사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지금 손에 있는 걸 놓지 않는다면 결코 다른 걸 얻을 수 없다는 것도.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삶을 택할 용기가 없었다.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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