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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01. 2019

정대현씨의 그 말이 유감인 이유

[엄마의 퇴사4]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육아휴직 복귀를 몇 달 앞두고 오랜만에 회사 모임에 나갔다. 퇴사하는 동기 환송회. 저녁에 아이를 남편에게 맡겨놓고 나온 건 처음이었다. 마침 모유수유 끊은 직후라 맥주는 꿀맛이었고, 어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게 즐거웠다. 내친김에 2차까지 갔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10여 명의 면면을 보다 깜짝 놀랐다. 나와 다른 미혼 후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였다. 아이가 있는 아빠도 여럿. 머릿속을 스치는 질문.



 ‘애는 누가 보고 있는 거지?’



회식 자리에 엄마인 여자 직원이 있으면 꼭 듣는 말이 있다. “애는 어떻게 하고?” “애는 누가 봐?” 남자들은 결코 듣지 않는 말. 이 물음에는 ‘애 엄마가 애는 안 보고...’라는 은근한 비난이 숨어있다.


나 역시 그런 질문을 너무도 당연하게 엄마들에게 던진 한 사람이었다. 육아는 엄마와 아빠가 함께 하는 것이다. 엄마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여성인 나조차도 애 보는 건 엄마의 일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엄마가 되기 전까지는.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은 애 아빠들을 보며, 집에서 혼자 아이를 돌보고 있을 애 엄마들을 떠올렸다.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들을. 술맛이 싹 가셨다.


  



남편 그리고 정대현씨


늦게까지 술자리에 남은 애 아빠들을 보며, 집에서 혼자 아이를 돌보고 있을 애 엄마들을 떠올렸다(이미지 출처 : unsplash)

  

“복귀는 취재로 할 거야? 편집으로 할 거야? 이제 다시 취재 해야지.”  



선배들이 물었다. 내가 다니는 언론사는 취재와 편집을 비교적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 취재가 안 맞아서 편집으로 옮겼고 업무에 만족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시 취재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최순실 국정농단과 촛불 그리고 박근혜 탄핵을 집에서 지켜보면서 ‘아, 내가 저 현장에 있었다면...’이라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문제는 육아였다. 남편 회사는 당일에도 언제 퇴근할지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프로젝트 단위로 일하는 형태라 여유로울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 노동 강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매일 밤을 샜고 주말도 없었다.


취재 기자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언제 이슈가 터질지 모르니 상시 대기조가 되어야 한다. 언제 현장에 나가야 할지, 언제 퇴근할지 알 수 없다. 마감 때문에 밤을 새는 날도 많다. 만약 내가 취재로 돌아가게 된다면 남편도 나도 불안정한 노동을 하는 상황. 어린이집 등하원과 보육을 안정적으로 책임질 다른 누군가가 필요했다. 친정엄마, 시어머니 혹은 베이비시터.


복직을 앞두고 고민하는 내게 남편은 말했다. 애 걱정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애 문제는 상황에 맞추면 된다고.


<82년생 김지영> 책 표지(이미지 출처 : 민음사)


“하고 싶은 일이야?”


아이 어린이집 가 있는 동안 아이스크림 가게 알바를 할까 고민하는 김지영씨에게 남편 정대현씨는 묻는다. 아, 여기서 김지영씨는 <82년생 김지영>씨다.  


이 대목에서 참 많이 화가 났다. 김지영씨가 왜 자신의 적성과 아무 상관없는 아이스크림 가게 알바를 생각하게 됐는지, 김지영씨가 아이 키우면서 하고 싶은 일도 하려면 얼마나 많은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지, 결정적으로 남편인 자신은 그런 아내를 위해 무엇을 어떻게 희생할 것인지. “하고 싶은 일이야?”라는 정대현씨의 질문에는 그런 고민이 전혀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텅빈 당위만 있다. 그래서 김지영씨를 더 비참하게 만든다.


“김지영씨는 10년 만에 다시 진로를 고민했다. 10년 전에는 적성과 흥미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훨씬 더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해야 했다. 최우선 조건은 지원이를 최대한 자신이 돌볼 수 있을 것. 도우미를 따로 고용하지 않고 어린이집에만 보내고도 일할 수 있을 것.”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p.162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정대현 역을 맡은 배우 공유. 사진은 <도깨비> 스틸컷(이미지 출처 : tvN)



‘애 생각 말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남편의 말에 화가 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어떻게 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나. 내가 어떤 일을 택하느냐에 따라 가족의 삶이 달라지는데.


친정은 부산, 시댁은 원주. 도움을 받는다면 이 좁은 집에서 친정엄마 혹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 베이비시터를 구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알지 못하는 사람 손에 어린 아이를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이 모든 걸 감수할 정도로 내가 취재 기자를 하고 싶은가? 그건 아니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8년 일·가정 양립지표'를 보면, 미혼일 때 비슷하던 남녀 고용률은 차이는 결혼 후 28.5%p까지 벌어진다. 특히 30대 여성 취업자의 경력단절 원인은 임신출산이 가장 많았다.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길 정도로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고, 그렇게 하고 싶은 일도, 그렇게 돈 되는 일도 아닌 것 같고, 친정엄마나 시터에게 주는 돈이나 내 월급이나 그게 그거인 것 같고... 많은 엄마들이 이런 이유로 일을 그만둔다. 여기에는 여성들이 계속 일을 했을 때 쌓을 수 있는 커리어나 미래의 임금에 대한 고려가 빠져있다.  


다행히 나는 편집 기자로 일한다면 안정적인 근무가 가능했다. 출근 시간이 여유 있는 남편이 등원을, 8시-5시 근무하는 내가 하원을 책임지면 적어도 어린이집 보내는 건 문제 없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남편과 내 힘으로 아이 키우며 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로 돌아가 해보고 싶은 일도 있었다.


이런 상황을 선배들에게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었다(궁금하다. 왜 이런 질문은 남자 선배들만 하는 걸까).


“애 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https://brunch.co.kr/@hongmilmil/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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