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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Dec 31. 2018

그 엄마가 퇴사 못하는 이유

[엄마의 퇴사3] 아이가 없었다면 선택이 좀 더 쉬웠을까

퇴사를 고민한 지는 오래되었다. 일하는 건 싫지 않았지만,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건 싫었다. 이 회사는 왜 이렇게 시스템이 없는지, 합리적이지 않은지, 소통이 안 되는지, 비전이 없는지... 회사 사람 2명 이상 모이면 매일매일 회사 욕, 선배 욕이었다. 메신저 알림 창은 쉴 새가 없었다.  


입사 초기만 해도 나와 회사를 과하게 동일시했다. 조직 안에서 부당한 일이 생길 때마다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까마득한 선배들에게 날선 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회사는 안 바뀐다는 걸.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인데. 나는 내가 곧 절인 줄 아는 스님이었다. 그만큼 회사에 애정이 많았다. 애정이 냉소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입사 9년차, 나는 회사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선배가 됐다.

 

“회사는 어차피 안 바뀌어. 제일 쓸데없는 걱정이 회사 걱정이야. 네 걱정을 해.”



어느새 나는 이 조직문화의 공범자가 돼있었다. 회사를 바꾸지도, 그렇다고 떠나지도 못했다는 열패감. 매일 회사를 욕하면서도 회사를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위했다. 그래도 이만한 회사가 없다고. 내가 일하는 곳은 진보성향의 언론사였고, 비교적 열린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분명한 건 그래도 회사는 회사였다.


 



무한루프


돌고 돌고 또 돌고(출처 : unsplash)



그토록 원하던 회사에 입사했지만 생각지 못했던 현실에 절망하고, 일에 치이고 사람에 치이고 몇 년을 버티고 또 버티다, 이 길은 도저히 아니라는 생각에 안정된 삶을 버리고 퇴사했더니, 돈은 조금 적게 벌지 몰라도 삶의 질이 달라졌어요!


라는 익숙한 퇴사서사.


하지만 현실은 참 찌질했다. 이번 달만 다니고 진짜 그만 둬야지, 이젠 진짜 진짜 아닌 것 같아, 팀장님 저 그만 둘게요 소리가 목 끝까지 차올라도 또 다시 출근 준비를 하고 눈 떠보면 일주일이 또 지나있다.


월초 : 월초부터 퇴사 이야기 꺼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지, 조금만 참아야지 하다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월 중반. 응? 월급날 얼마 안 남았네. 월급은 받고 그만둬야지.


25일 : 막상 월급이 통장에 딱 들어오면 마음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내가 막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 같고 막 안정감이 들고. 기분이다! 맛있는 거 비싼 거 좀 사먹고, 인터넷 쇼핑도 좀 해주고... 그래, 사람은 역시 돈을 벌어야 해.


월말 : (이미 통장은 텅장으로) 이 돈 가지고 퇴사해서 될 일인가 싶고, 한 달만 더 일해서 여행자금이라도 벌까 싶고. 무엇보다 이번 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인수인계 하고 나가려면 역시 월초에 이야기하는 게 낫겠지.


이런 식의 무한루프. 하루하루는 정말 고된데 한주, 한 달은 왜 이리 빨리 가는지.


 



월급이라는 마약


엄마가 되자 퇴사는 더 어려워졌다(출처 : unsplash)



엄마가 되자 퇴사는 더 어려워졌다. 나 혼자만 생각할 수 없었다. 남편에 아이까지. 고려해야 할 변수가 3배로 늘어났다. 내 선택은 곧 가족의 부담이 되었다. 몸이 무겁고 둔해졌다.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회사를 그만 두고 싶을 때면 전업맘이 된 내 모습을 떠올렸다. 엄마를 전업맘과 직장맘 이분법으로 나누는 세상에서 직장을 다니지 않는 엄마의 삶은 납작하게 묘사된다.


내가 생각하는 전업맘의 스테레오 타입은 사회가 규정해놓은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집에서 살림‘이나’ 하고 애‘나’ 키우는 모습. 사회인으로서의 나는 삭제된 채 아이만 남은 삶. 도무지 그런 생활을 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내 손으로 돈을 벌지 못한다는 건 큰 두려움이었다.


육아 휴직이 끝난 후 회사를 그만두고 애 둘을 키우는 친구는 말했다. 육아 휴직 급여 나올 때가 그나마 남편에게 큰소리 칠 수 있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고.


머리로는 안다. 친구가 수년간 해오고 있는 가사와 육아 노동의 가치를. 그게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사회 구조가 잘못됐다는 걸. 하지만 친구가 커피 값이나 밥값을 나눠 낼 때마다 왠지 친구 남편 돈을 쓰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손에 쥘 수 있는 화폐를 벌지 못하는 친구가 남편에게 경제적으로 종속됐다고 생각했다. 친구의 돌봄 노동이 있었기에 그 남편이 야근과 출장을 밥 먹듯 하며 돈 벌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지금도 기억한다. 육아 휴직이 끝난 후 온전한 한 달 분의 월급이 나왔을 때 느꼈던 그 안정감을. 월급이라는 마약을 내가 포기할 수 있을까. 월급이 끊기는 순간, 남편과 동등한 관계도 무너지는 게 아닐까. 가사와 육아의 부담을 모두 내가 짊어지게 되면 어쩌지.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자. 8년 넘게 일한 퇴직금으로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입사 직전까지도 나는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했다. 대학에 입학한 스물 한 살 이후 10년 넘게 경제활동을 쉬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내가 월급 없는 삶을 견딜 수 있을까.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먹고 사는 여자'라는 시선까지 덤으로.


퇴사를 하고 돈 대신 시간을 번다고 치자. 엄마가 된 나는 이제 내 시간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쓸 수 없다. 내게 허락된 시간은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을 때뿐이다. 공부건 프리랜서건 재취업이건, 과연 새로운 커리어 모색이 가능할까. 아이가 없거나 혹은 아이가 없는 것처럼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여전히 과노동이 미덕인 사회에서 주양육자는 환영받지 못하는 인력이다. 그러니 엄마들은 택할 수밖에 없다. 애가 없는 것처럼 일하거나, 일하는 것처럼 애를 보거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곳에 머무르는 게 그나마 차악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던 이 회사가 갑자기 안전하고 튼튼한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최소한 이곳에서는 잘릴 걱정은 안 해도 되니까.


어쩌다 이런 신세가 돼버렸지, 비참한 심정으로 다시 출근길 버스에 올랐다.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가 없었다면. 좀 더 선택이 쉬웠을까.



[엄마의 퇴사] 기자 9년차, 엄마 3년차. 직장맘으로 사는 일상은 매일이 장애물 넘기다. 죽도록 노력하는데 회사에도 아이에게도 늘 미안하기만 하다. 엄마에게 일과 육아 중 하나만 선택할 것을 요구하는 시대. 일도 육아도 적당히 하며 살 수는 없을까?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도 나를 지키고 싶었던 어느 엄마의 퇴사 일기.


https://brunch.co.kr/@hongmilmil/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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