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를 뛰어넘는 일에 대해
새해에는 운전면허를 따겠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녔다. 1월 첫째 주는 어쩐지 사람이 많을 것 같아 1월 둘째 주, 도로주행 코스가 쉽다는 경기도 한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운전면허 학원이라길래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학원에는 딱 4번만 가면 됐다. 첫날은 오전에 3시간 안전 교육 듣고 오후에는 셔틀버스 타고 운전면허 시험장 가서 필기시험을 친다. 공부는 미리 혼자 해야 한다. 둘째 날은 오전에 장내 기능 교육 4시간 듣고 오후에 바로 시험을 친다. 셋째 날은 도로 주행 교육 6시간 중 일부를 듣고, 넷째 날은 나머지 일부를 들은 후 바로 시험을 친다. 필기, 장내 기능, 도로주행을 모두 한 번에 통과한다면 4일 만에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다.
1월부터 운전면허 따려는 사람이 많은 것 말고 변수가 또 있었다. 바로 수험생과 방학 중인 대학생. 학원은 롱 패딩이나 숏 패딩 차림의 앳된 얼굴로 붐볐다. 교육 날짜 잡는 것부터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예정대로 시험에 합격한다면 2월 초에는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면허 따자마자 연수받고 봄에는 차 끌고 캠핑도 가고 제주도 여행도 가야지 꿈에 부풀었다.
필기시험은 어플을 이용해 공부했다. 2종 보통이라 60점이 커트라인인데 90점을 맞았다. 문제은행에서 나오는 거라 달달 외웠더니 10분 만에 시험이 끝났다.
다음은 장내 기능. 엑셀이 어디 있고 브레이크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데 4시간 수업 듣고 바로 시험 친다는 게 가능한 일 같지 않았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다들 유튜브로 미리 공부하고 간단다. 기기 조작부터 가속주행, 직각주차 공식, 좌회전-우회전하는 법까지 다양한 콘텐츠가 올라와 있었다.
댓글을 보니 운전면허 학원에서는 이렇게 자세히 안 알려준다고, 강사가 그냥 감으로 하라고 하면서 혼만 냈다는 후기가 많았다. 기능에서 몇 번이나 떨어져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가 이 영상 덕분에 합격했다는 감사의 인사도 있었다. 코스를 외워 가면 교육받을 때도 훨씬 수월하다는 말에 영상을 보고 또 봤다. 남편이 늦게 오는 날이라 아이도 옆에서 같이 눈으로 운전 연습을 했다.
다음날 아침 7시에 셔틀버스 타려면 6시에는 일어나야 하는데 잠이 안 왔다. 나는 긴장을 많이 하는 성격이다. 두 번째 수능 볼 때도 전날 잠을 한숨도 못 잤다. 거실 소파에 누워 요가 니드라를 틀어보고 1등석 비행기 10000m 상공 ASMR을 틀어봐도 잠이 안 왔다. 눈만 감으면 아까 봤던 운전 영상이 떠올랐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어나지 않을 일을 미리 걱정하며 시뮬레이션해보는 것도 특기 중 하나다. 사실 이건 좀 창피한 이야긴데 필기시험 치기 전날에도 잠을 설쳤다.
아침에 퀭한 눈으로 일어나 다시 유튜브 영상을 봤다. 아이가 눈을 비비며 작은 방으로 오더니 “엄마 운전면허 따러 가는 거야? 파이팅" 인사를 해준다. 셔틀버스를 타고 또 경기도까지 갔다. 강사가 배정됐고 노란색 연습용 차량에 앉아서 드디어 운전대를 잡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날 나는 시험을 포기했다.
강사는 운전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눈으로 하는 거라며, 차선 중앙을 걸어서 간다고 생각하고 멀리, 멀리 내다보면서 운전을 하라고 했다. 핸들을 어디까지 돌려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하면 그건 정해진 게 없다고, 내가 중앙에 바로 서 있다고 생각할 때까지 돌리면 된다고, 걷는 거랑 운전하는 거랑 똑같다고 했다.
그때부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교육이 4시간 동안 이어졌다. 브레이크를 세게 밟으면 왜 이렇게 세게 밟냐고 하고, 핸들을 살살 돌리면 왜 이렇게 겁이 많냐고 했다. 자기 자신을 왜 못 믿냐고. 운전은 자신감이라고. 앞에 오는 차 때문에 브레이크를 밟으면 왜 세우냐 뭐라 하고, 안 세우면 왜 앞도 제대로 안 보고 가냐고 했다. 실수 때문에 멘털이 나가 있으면 왜 실수에 사로 잡혀 있냐고 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정신을 집중하라고 했다. 이쯤 되면 내가 지금 운전면허 학원에 와 있는 건지 정신 교육을 받으러 온 건지 헷갈렸다. 그제야 유튜브에 달려 있던 댓글이 이해가 갔다.
여기서 또 나오는 나의 성격. 누가 혼내면 더 못 한다. 옆에서 계속 뭐라고 하면 잘하던 것도 못 하게 되어버린다. 일할 때 자율성과 주도권을 갖고 일해야 성과가 더 잘 나오고, 운동도 강사에게 지적당할 일 없는 홈트를 좋아한다.
유튜브 덕분에 처음에 직각 주차만큼은 잘했다. 그런데 좁은 차 안에서 50분 교육받고 10분 쉬고, 55분 교육받고 5분 쉬면서 쉴 새 없이 혼나다 보니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됐다. 직각 주차 공식이 뭐였는지 핸들을 왼쪽으로 돌리는 게 맞는지, 오른쪽으로 돌리는 게 맞는지, 한 바퀴였는지 두 바퀴였는지... 머릿속이 하얬다. 그냥 이 차에서 내리고 싶었다. 게다가 전날 잠을 못 자서 뇌가 정지된 것 같았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싶었는지 강사는 칭찬도 해봤다 응원도 해봤다 나중에는 오늘 꼭 시험을 안 봐도 괜찮다고 말했다. 지금 상태로 시험 치면 아마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 것 같다고. 내 생각도 같았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운전면허 교육 2시간을 더 신청하고 시험 날짜를 다시 잡았다. 카운터 직원은 “멀리서 오셨는데…”라며 안타까운 눈빛으로 스케줄을 잡아줬다.
셔틀버스를 타고 다시 집 근처로 오는데 자괴감이 밀려왔다. 남들은 다 척척 붙는 것 같은데. 길거리에 이렇게 차가 많은데. 나는 왜 이리 담대하지 못 할까. 이렇게 소심하고 예민해서 진짜 운전은 할 수 있을까. 그나저나 저 학원에 다시 안 가고 싶다. 아 그냥 포기할까.
이럴 때는 수다를 떨어줘야 한다. 운전면허 딴 지 얼마 안 돼 사고를 내서 장롱 면허로 있다는 친구랑 카톡을 했다.
“남들은 잘만 하던데 ㅠㅠ 우린 운전 왜 이렇게 힘드냐.”
“내 말이 ㅠㅠ 고딩들도 하는데.”
“니는 그래도 운전면허라도 있잖아. 부럽다.”
“누가 보면 엄청 대단한 건 줄 알겠네.”
"새해부터 좌절 ㅠㅠ"
"인생이 그런 거지. 좌절하고 취소하고 떨어지고 ㅋㅋㅋ"
얼마 전 아이와 <씽2게더>를 봤다.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들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 같은 상황에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역경과 고난을 뚫고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른 내가 되는 이야기를 보면서 마지막에 눈물도 찔끔 흘렸다. 그런데 사실 잘 모르겠다. 역경과 고난을 꼭 헤쳐나가야 하는 건가. 꼭 다른 내가 되어야 하나. 그냥 생긴 대로 살면 안 되나.
소파에 멍하니 누워 있다 아이를 데리러 갔다. 담임교사가 “오늘 운전면허 보셨다면서요?” 묻는다. 그 엄마의 그 아들 아니랄까 봐 아이가 엄마 운전면허 시험 본다고 어린이집에 동네방네 소문을 다 내고 다녔다. 옆에 있던 교사가 말한다. “오늘도 엄마 운전하고 오느라 늦는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게... 운전까지 하려면 좀 걸릴 것 같아요"라며 황급히 어린이집 현관을 나섰다. 아이에게 늘 하는 말. 해보지도 않고 못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고. 처음에는 다 힘들지만 계속하다 보면 나중에는 쉽다고. 못 하더라도 노력하는 자세가 중요하다고. 차마 엄마 운전면허 포기하겠다는 말이 안 나왔다.
다음날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있는데 아이가 문을 두드리며 묻는다.
“엄마 어딨어???”
“어… 엄마 화장실에서 응가해.”
“아… 난 또 엄마 운전 연습하러 갔나 했어.”
아무래도 운전면허를 어서 따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