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송장 일주일
지난 주말부터 장염에 걸려 일주일 가까이 산송장처럼 지냈다. 먹기만 하면 바로 화장실에 가고 속이 뒤틀리니 나중에는 먹는 게 두려운 지경이 됐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침대에 계속 누워 있었더니 머리가 아프고 다리까지 저렸다.
1월부터 쉬어가기로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병나는 성격이라 일부러 루틴을 만들어 하루, 일주일을 꾸렸다. 매일 아침 일어나 운동을 하고 집을 정돈하고 공부를 하거나 뭔가를 배우거나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쓰거나 동네를 돌아다녔다. 저녁에는 아이와 시간을 보냈다. 남편이 바쁜 시즌이라 유난히 시간이 빨리 흐른다. 벌써 2월 중순이다.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있는데 ‘내가 이럴 때가 아닌데’ 우울해졌다가 ‘지금은 이래도 될 때’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히 침대를 지켰다. 미룰 수 있는 건 다 미뤘다. 자다자다 지치면 넷플릭스에서 <더 크라운>을 보고, 전자책으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었다. 유튜브에서 양배추 식단을 검색했다. <더 크라운>은 드디어 시즌2까지 정주행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성장기도 좋지만 시즌1에서는 윈스턴 처칠의 초상화, 시즌2에서는 필립공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가 가장 좋았다. 도무지 사랑하기 힘들어 보였던 인물을 한 명의 사람으로 이해하게 됐다.
어제부터 정신이 조금 들어서 번역 과제를 하다 보니 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다. 아이를 데리고 와서도 식탁에 과제를 펴놓고 있었다. 아이는 옆에 와서 종이접기를 했다가 그림 그리기를 했다가 책 읽어 달라 했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잘 안 풀리는 문장 때문에 계속 과제에 눈길이 가 있자 아이가 종이를 들여다보더니 말한다.
“뭐야! 영어잖아! 엄마는 쓸데없는 것만 한다니까.”
‘쓸데없다'는 말에 발끈해서 아이에게 말했다.
“날날아. 영어가 왜 쓸데없어. 영어 배우면 얼마나 좋은데.”
“치. 나는 엄마가 일 많아지는 거 싫은데 엄마는 피아노도 배우고, 운전도 배우고, 뜨개질도 하고. 다 쓸데없어.”
“그게 왜 쓸데없는 거야.”
“나랑 안 놀아주는 거면 다 쓸데없어!”
아이 말에 웃음이 났다. 아이 기준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사실 나한테는 이 모든 게 ‘일'과는 관계없는 일인데,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를 뺏어가는 건 다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자기한테는 하나도 ‘쓸데없는 일'. 그나저나 올해는 쓸데없는 일만 하겠다고 선언해놓고는 ‘쓸데없다'는 아이 말에 발끈할 건 또 뭐람. 여전히 나는 쓸모가 중요한 사람인가 보다.
오늘은 드디어 정상적으로 식사를 했다. 못 먹는 고통이 이토록 크다는 걸, 먹지 못해 보고서야 깨닫는다. 몸이 아프면 아무것도 못한다는 당연한 진리도 함께. 그래도 장염 덕분에 모처럼 푹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