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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Feb 24. 2022

"나 그림 못 그려" 6살 아이의 반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스승의 날 카드가 문제였다.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줄 카드 3장을 완성해야 했다. 저녁 먹고 스케치북 사이에 두고 아이와 거실 바닥에 앉았다.


“자, 이건 별이(공동육아 어린이집에서는 교사를 별명으로 부른다)한테 줄 카드야. 어떻게 꾸며볼까?”


아이는 종이에 스티커를 잔뜩 붙이기 시작했다. 이러다 어몽어스 스티커로 앞뒷면을 다 채울 기세다.


“자, 우리 스티커만 붙이지 말고 그림도 그려보자. 별이 카드에 어떤 그림 그리고 싶어?”


사인펜 든 아이의 손이 종이 위에서 잠깐 움직이다 멈춘다. 어두워지는 얼굴. 기어가는 목소리.


날날이 : “나 그림 못 그리는데…”

나 : “아니야! 못 그리는 게 어딨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리면 돼!”


텐션을 끌어올려 밝은 목소리로 아이를 격려했다. 슥, 슥, 스으으. 다시 펜을 든 아이는 선을 그었다 이내 힘이 없어진다.


“나 그림 못 그려. 엄마가 그려.”




최악이다, 최악


세모 그리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pexels


벌써 밤 9시 반. 한숨이 푹 나온다. 아이는 별이에게 주는 편지니까 별 모양을 그리고 싶다 했다. “이렇게 세모, 반대편에 이렇게 세모를 그리면 별 모양이 되는 거야.” 알려줘 보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점에서 점까지 직선이 아니라 물결이 친다.


아니. 여기 점, 여기 점, 여기 점. 세 개만 슥슥슥 연결만 하면 되는데 세모 그리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야? 별 그리는 게 이렇게 힘들 일이냐고.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을 애써 삼킨다.


이제 6살. 다른 애들은 엄마 아빠 모습도 그림으로 그리던데 날날이는 형체 있는 그림은커녕 펜도 아직 제대로 못 잡는다. 다른 애들은 젓가락질도 잘하고 빠른 애들은 한글도 쓰던데.


아니다. 아이마다 발달 단계가 다르고 날날이에게는 날날이만의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부모가 자신의 욕망을 아이에게 투영하는 건 어른답지 못한 일이다.


그런데 말이다. 벌써 6세 중반인데 아직 세모도 못 그리고. 펜도 제대로 못 잡고. 이건 좀 심한 거 아닌가? 그래. 못하는 건 그럴 수 있다고 쳐.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저 태도는 뭐지?


아이를 키우면서 속이 터질 때는 두 가지 경우로 나눌 수 있다. 나랑 너무 닮아서. 나랑 너무 달라서.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겪어본 인간이라고는 나밖에 없으니 나를 기준으로 아이를 판단하게 된다.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들면 자신감과 의욕이 땅굴을 파고드는 모습. 아이는 나를 닮았다. 넉살 좋게 뻔뻔하게 해 보면 좋으련만.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이는 아이대로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린다. 그만하고 싶다고, 엄마가 하라고 짜증을 낸다.

“날날아! 너 왜 해보지도 않고 못 하겠다고 해!
너 그렇게 포기하다가는 평생 이렇게밖에 그림 못 그려.
누가 보면 이 그림은 시냇물방(5세반) 동생들이 그렸다고 할 걸!”

입이 삐죽삐죽. 결국 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이 나이 아이들에게 한 살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여섯 살 자부심이 얼마나 큰데 다섯 살이랑 비교하다니. 아 정말 최악이다. 내가 정말 최악이다. 남편은 옆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부인. 나한테 하는 것처럼 애한테 하지 마.”


우는 아이를 재우러 간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는 쓰레기야.”



그림을 못 그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그림을 잘 못 그리는 건 괜찮았다. 나도 남편도 미술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문제는 시도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발을 빼는 모습이었다. 부족해도 조금씩 노력해서 성장하는 게 아니라 아예 못하겠다고 하는 모습. 저런 태도가 나중에 학습을 할 때도, 삶을 살아가면서도 그대로 나타날 것 같았다. 아이가 등 센서 때문에 누워서 잠들지 못할 때처럼, 일어나지도 않은 부정적 상황을 상상하며 대하드라마를 쓰고 있었다.


남편은 말했다. 날날이는 아직 6살이라고. 계속 자라고 있다고. 차근차근 계단식으로 성장할 수도 있지만 갑자기 확 성장할 수도 있다고. 무엇보다 지금 날날이는 연필 쥐는 것도 잘 못하는데 어떻게 그림을 잘 그릴 수 있겠냐고.


남편의 말에 수긍이 가면서도, 그렇게 아이를 잘 이해하고 있으면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는지 화가 났다. 본인은 마치 이 상황과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자기가 평론가야 뭐야. 역시나 모범생 병을 벗어나지 못한 남편은 그림 쉽게 그리기 책을 바로 주문했다.


얼마 후, 담임교사와의 면담에서 고민을 털어놓았다. 교사는 말했다. 지금은 아이에게 평생 믿음을 심어주는 시기라고. 날날이는 칭찬을 해줄수록 더 잘하는 아이이니 혼을 내기보다는 작은 것도 계속 칭찬하고 응원해 주라고. 이왕이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했는지 장점을 이야기해주면 더 좋다고.


경쟁심이 강하기는 한데 대놓고 경쟁심을 불태우는  아니라 뒤에서 조용히 계속 연습해서 ‘,  잘하지?’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성격. 게다가 강한 인정 욕구까지. 아이는 나를 닮았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바로 잔소리다. 



날날이의 미술관

 

아이는 스스로를 미술가라 부르기 시작했다. 사진은 자료 사진 @pexels


몇 달 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아이가 갑자기 그림에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레고 만들기만 좋아하던 아이가 집에만 오면 스케치북을 꺼내서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여전히 형체를 알아볼 수 없기는 한데 아이만의 상상력과 개성이 가득했다. 특히 색감을 쓰는 방식이 독특했다. 어떻게 이렇게 색 조합을 쓸 수 있을까. 아이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날날이가 그린 그림을 보면 좀 신기해. 얘는 세상을 이렇게 바라보는 걸까?”


아이는  현관 앞에 자신의 그림을 붙여놓고 날날이의 미술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써달라 했다. 집구석구석 그림을 전시했고, 친구들에게 그림을 선물했다. 아이는 스스로를 “미술가 불렀다. 담임교사는 이전에는 그림   그리는 것도 힘들어하던 아이가 이제는  장씩 거침없이 그림을 그리고, 만들기  때도 ‘한번 해보지 라는 태도로 자신감 있게 아이디어를 낸다고 말했다. 날날이가 정말 많이 변했다고. 감동이라고.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림에 대한 잔소리 대신 계속 칭찬을 해줬다. 가끔은( 많이) AI 같은 순간도 있었지만  그림은 어떤 점이 특별하고, 이전 그림과는 어떻게 달라졌는지 구체적인 피드백을 곁들였다. 어린이집에서도 교사가 함께 애썼다.


칭찬을 너무 많이 했더니 부작용도 나타났다. 아이 앞에서 다른 그림을 칭찬하면 안 된다. 아이와 샤갈 특별전을 보러 가기로 했다. '색채의 마술사'라 불리는 샤갈의 그림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스마트폰으로 미리 작품을 보면서 '이 사람 진짜 그림 잘 그리지?' 했더니 아이가 하는 말.


“치. 샤갈이 나보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아이가 자기만 특별하다 생각하기를 원치 않는다. 칭찬이 과했나 걱정하고 있는데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는 같은 어린이집 엄마가 말했다. 학교 가면 어차피 다 자기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금방 알게 된다고. 그러니 지금은 자신감에 취해도 괜찮다고. 내가 또 너무 앞서갔구나. 


오늘도 아이는 나는 결코 그리지 못할 그림을 그려낸다. 그림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나는  번도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다.  아이가 어떻게 자랄까. 불안보다는 기대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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