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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Feb 28. 2022

운동을 했더니 삶이 제대로 꼬였다

[나를 키운 여자들] <아워바디> 속 자영 

근육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팔, 거북이처럼 굽은 목과 어깨, 초점 없는 눈. 서른한 살 자영(최희서)은 8년째 행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 이제는 시험 당일 컨디션 조절만 잘하면 될 정도로 오랜 시간 공부를 해왔건만 자영의 머리에는 더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다. 허름한 자취방에서 무미건조한 섹스를 마친 후, 남자 친구는 자영의 집에 놔뒀던 짐을 아무렇지도 챙겨 떠나며 말한다.

 

자영아, 공무원은 못 돼도 사람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냐. 잘 살아.


연인이 이별을 고하는데 자영의 얼굴에서는 어떠한 표정도 읽을 수 없다. 결국 자영은 시험을 보러 가지 않는다. 남자 친구의 말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자영은 자신의 삶에서 시험이라는 어쩌면 유일했던 선택지를 지워버린 듯하다. 어린 시절 많은 상장을 받았고, 명문대까지 들어가며 엄마의 자랑이 되었을 자영. 이제 시험은 절대 안 보겠다는 자영에게 엄마는 말한다. 

 

내가 너 때문에 죽겠다. 


자취방 월세, 전기세, 가스비, 건강보험료. 경제적 지원을 중단하며 엄마가 시위하듯 보낸 계좌번호를 받아든 자영은 다른 크루들과 함께 '나이트 러닝'을 하고 있는 현주(안지혜)를 만난다. 얼마 전에도 자영은 동네에서 현주를 우연히 마주친 적 있다. 계단 올라갈 힘도 없어 계단 중간에 풀썩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그 계단을 거침없이 뛰어가던 건강하고 탄탄한 몸. 자영은 자신과 정반대 몸을 가진 현주를 동경한다. 


자영은 현주와 함께 나이트 러닝을 시작한다. 낮에는 중학교 동창이 대리로 있는 회사에서 갓 대학을 졸업한 취준생들과 일당 5만 원짜리 사무직 아르바이트를 하고, 퇴근 후에는 크루들과 도심 속을 달린다. 처음에는 숨이 차 죽을 것 같았던 달리기는 점점 몸에 익는다. 달릴수록 자영의 몸은 달라진다. 외형적 변화는 물론이고 몸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운동을 했더니 인생이 달라졌어요'라는 희망찬 서사를 기대하고 영화 <아워바디>를 봤다면 이제부터 실망하게 될지 모른다. 운동 때문에 자영의 인생이 달라지는 건 맞다.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운동이 삶을 바꾸지 못했을 때 

 


▲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현주가 그랬던 것처럼 달리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 영화사 진진

 

영화 중반, 자영이 그토록 동경했던 현주는 아마도 자의였을 교통사고로 죽는다. 현주가 왜 죽었는지, 영화에서는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다. 관객은 그저 현주의 우울하고 불안한 얼굴을 엿봤을 뿐이다. 출판사에 다니며 7~8년간 꾸준히 운동을 하고 틈틈이 소설을 쓰며 등단을 꿈꿨던 현주의 마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현주가 그랬던 것처럼 달리기에 강박적으로 매달린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자영의 삶은 도무지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스물네 살이 신입으로 입사하는 회사에 서른 평생 해본 것이라고는 공부밖에 없는 자영이 정규직 신입으로 들어갈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운동이 삶을 바꾸기에 세상의 벽은 너무나 견고하다. 


실제로 자영처럼 오랜 시간 취업 준비를 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리기를 했다는 한가람 감독은 손희정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시나리오를 썼던 30대 초반, 사회에 아무런 기대가 없었다. 시도한 모든 것이 실패한 것 같았고, 절망한 상태였다. 운동도 삶을 바꾸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


SNS에서 유행하는 모델 한혜진의 '운동 자극 명언'이 있다. 많은 여성이 동경하는 몸을 가진 한혜진은 자신이 근력 운동에 집착하는 이유에 대해 "세상 어떤 것도 제 마음대로 안 된다. 일도 사랑도 제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면서 "그런데 유일하게 내 컨트롤 하에 제일 쉽게 할 수 있는 게 몸이다. 몸 만드는 게 제일 쉽다"고 말한다. 


하지만 몸은 몸 자체만으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람들이 운동에 기대하는 것은 한혜진의 말처럼 '몸이 바뀌었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바뀐 몸 혹은 몸을 바꾸는 과정에서 쌓인 경험을 자본 삼아 '삶이 어떻게 바뀌었느냐'다. 


운동을 통해 달라진 몸, 달라진 마음을 기반으로 개인 브랜딩을 하거나, 더 나은 직장을 구하거나, 아니면 이성에게 매력을 어필하거나. 사회적 쓸모를 입증하지 못하는 운동은 쓸데없는 일, 팔자 좋은 일이 되어 버린다. 


이런 맥락에서 자영의 운동은 쓸모있는 것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요즘 달리기를 한다는 자영에게 "달리기할 근성이면 뭐라도 하겠다"고 쏘아붙이는 자영 엄마의 말은 이러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자영에게 아르바이트 자리를 소개해 준 민지는 인턴 원서를 쓰지 않겠다는 자영에게 "운동만 해서 강사라도 하게?"라고 비꼰다. 강사 되려고 운동하는 게 아니라고, 인턴 지원 안 하는 게 그리 큰일이냐고 되묻는 자영을 한심하게, 조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을 담아 쳐다보며 민지는 이렇게 말한다.

 

부럽다. 너. 현실 감각 없이 살아서.



현실 감각 없는 선택 

 


▲ 자영은 달리기를 하면서 자기 몸의 주인이 된다. ⓒ 영화사 진진


물론 달라진 것은 있다. 딱히 꿈도 없이 엄마의 기대, 사회적 기대에 끌려다녔던 자영은 달리기를 하면서 자기 몸의 주인이 된다. 자영은 처음으로 거울 앞에서 옷을 벗고 몸 근육 하나하나를 들여다본다. 


몸을 컨트롤할 수 있게 된 자영은 자신의 욕망을 직시한다. 중년 남자 부장과 섹스를 하며 "나이 많은 남자랑 자보고 싶다"는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실현해 보는가 하면, 사무실 컴퓨터를 초기화하고 힘들게 얻은 인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30년 동안 세상이 정해놓은 루트를 충실히 따라왔던 자영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파괴한다.


최근 나도 자영처럼 오랫동안 몰두하고 공들였던 일을 그만뒀다. 매일 열심히 살고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노력해도 딱히 삶이 나아질 것 같지 않은 예감이 들 때가 있다. 봉우리를 하나 넘으면 또 다른 봉우리, 또 다른 골짜기가 기다리고 있는 느낌. 오늘보다 내일이 나을 것 같다는 믿음이 없어지자 달릴 동력도 점점 사라졌다. 물론 여태껏 그래왔듯 나를 쥐어짜고 몰아붙이면 계속 달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관성과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그게 어떻게 사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자영은 야근을 하고 들어와서도 뛰고, 출근하기 전에도 뛴다. 그렇게 건강해진 몸으로 계속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을 내린다. 운동을 통해 삶의 위기를 극복할 줄 알았는데 극복은커녕 오히려 구렁텅이로 더 빠져든다. "현실 감각이 없는" 자영의 기이한 행동을 보며 뒤통수가 얼얼하면서도 동시에 통쾌했다.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참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세상은 속삭인다. 모든 것은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정말 그런가? 달리기를 시작하기 전에도 이미 자영은 8년간 책상 앞에서 혼자만의 달리기를 해왔다. 모두가 열심히 달리는데 모두가 희망을 발견하기 힘든 상황이 온전히 개인만의 문제일까.



나중의 모호한 행복 대신 

 


▲ 정규직이 됐다면, 공무원이 됐다면 자영은 행복해졌을까 ⓒ 영화사 진진

 


회사에서 정규직이 되었다고 거짓으로 말하는 자영에게 엄마는 회사 다니면서 공무원 시험 준비를 계속하면 안 되냐고 묻는다. 요즘 회사 다녀봤자 얼마나 다니냐고, 그래도 공무원이 더 낫다고. 자영은 대답을 회피하며 엄마에게 묻는다.

 

자영 : 엄마, 엄마는 쉬지 않고 얼마나 오래 달려봤어?
엄마 : 얼마나 뛰었는데?
자영 : 처음에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내가 이것만 하면 세상에 못할 게 없을 것 같더라고.


그런데 아무리 달려봐도 세상에는 못할 게 많았다고, 달리기와 세상은 다르더라는 이야기를 자영은 하고 싶었던 걸까. 엄마는 그다음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영에게 말한다. 

 

좀만 더 했으면 등에 날개 달고 날아다닐 텐데. 안쓰러워 그러지.


엄마의 말처럼 좀만 더 했으면 자영은 공무원이 될 수 있었을까. 공무원이 됐다면 자영은 "등에 날개 달고 날아다닐" 수 있었을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조금만 더 참으면'. 자영은 나중의 모호한 행복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편을 택한다. 


최근 입사 한 달밖에 안 된 공무원이 업무 과중을 호소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뉴스를 보며 자영을 떠올렸다. 자영은 지금도 어디선가 달리고 있을까. 무언가 이루기 위한 달리기가 아닌 자신이 되기 위한 달리기를 하고 있을까. 자영이 어떤 선택을 내리든 그녀를 응원하고 싶다.


나를 키운 여자들 

취업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지러울 때,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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