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Mar 18. 2022

술에 취한 여자는 죄가 없다

[나를 키운 여자들] <프라미싱 영 우먼> 속 캐시

저런 여자들은 알아서 제 무덤 파는 거야.


만취한 여자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홀로 소파에 앉아 있다. 옷매무새는 흐트러졌고 벌어진 다리 사이로 살짝 속옷이 보인다. 바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세 남자가 여자의 모습을 지켜보며 한 마디씩 거든다. 

 

자기가 안 조심하는데, 이런 클럽에 오는 남자가 덕을 좀 본대도 뭐라 할 거야.


셋 중 말을 아끼고 있던 한 남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여자에게 다가간다. 남자는 집에 가는 길에 여자를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택시에 탄다. 그러고는 완전히 뻗기 전에 술 한 잔만 더 하자며 여자를 자기 집으로 이끈다. 여자의 의사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여자의 몸을 더듬던 남자는 급기야 여자의 팬티를 벗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취한 것 같았던 여자는 갑자기 정색하며 남자에게 묻는다.

 

야! 뭐 하는 거냐고 묻잖아.


영화 <프라미싱 영 우먼>의 첫 장면이다. 캐시(캐리 멀리건)는 낮에는 동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이면 클럽에서 만취한 척 연기를 한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남자들이 접근해오고 동의를 받지 않은 채 추행을 한다. 


캐시가 갑자기 정색하는 순간, 남자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이 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도 않게 강제 추행을 하던 남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나쁜 남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아직도 나랑 하고 싶어? 다음에 누구 만날 땐 조심해"라며 참교육을 시전한 캐시는 집에 돌아와 다이어리를 꺼내 실적을 기록한다.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없는 빨간선, 파란선, 검은선으로 가득한 다이어리를 보며 캐시가 이 위험한 일을 꽤 오랫동안 해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체 캐시는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걸까. 시계를 7년 전으로 돌려보자. 



웃지 않는 여자 



▲ 캐시는 왜 이런 미친 짓을 하는 걸까 ⓒ 유니버설픽처스코리아

 


캐시와 함께 의대를 다녔던 니나는 어린 시절부터 캐시의 절친이자 우상이었다. 어느 날, 만취한 니나는 의대생 동기인 알에게 다른 남자 동기들이 보는 앞에서 성폭행을 당한다. 니나의 온몸에 멍이 들고 더러운 소문이 나돌지만 대학 당국에서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제대로 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결국 니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캐시는 당시 니나와 함께 있어주지 못했던 것에 죄의식을 느끼며 평생 꿈꿨던 의사가 되기를 포기한다. 그리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불특정 남성에게 복수를 하며 살아간다. 컬이 굵게 들어간 금발 머리에 핑크색 가운을 걸치고 공주풍 집에 살고 있는 캐시의 모습에서는 <금발이 너무해> <퀸카로 살아남는 법> 같은 2000년대 초반 하이틴 로맨스 여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캐시에겐 이들과 다른 점이 있다. 결코 웃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  


의대 동기였던 라이언(보 번햄)과 우연히 만나면서 캐시는 그때 그 시절 대학 동기들이 허무할 정도로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니나를 성폭행했던 알이 마취과 의사가 되었고 곧 결혼할 예정이라는 것도. 캐시는 좀 더 직접적인 복수를 시작한다.  


캐시의 복수는 남성만을 향하지 않는다. 7년 만에 다시 만난 여자 동기는 애초에 니나가 정신을 잃을 만큼 취했던 게 문제라고, 아무하고나 자고 다닌다는 소리를 듣는 아이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 항변한다.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여자 학장은 니나가 취해 있었다면 그 기억이 옳지 않을 수도 있다고, 이런 고발이 들어올 때마다 젊은 남자의 인생을 망쳐야 하냐고 되묻는다.


술에 취한 여성을 강간한 남성이 문제일까? 술에 취한 여성이 문제일까? 성범죄에 관용적인 문화 속에서 성범죄 피해를 당한 여성은 '그런 일을 당할 만한 행동을 했는지' 끊임없이 심판받는다. 세상은 '피해자다움'을 기준으로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를 나눈다. 영화는 니나가 겪었던 일이 니나가 '그렇고 그런 여성'이라서 당한 일이 아니라, 여성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매우 직접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이건 네 잘못이 아니야 

 


▲ 캐시는 제대로 된 복수를 하기로 결심한다 ⓒ Focus Features

 


복수 과정에서 캐시는 당시 성폭행 현장을 촬영한 동영상을 뒤늦게 보게 된다. 의대 동기 모두가 돌려보며 낄낄댔지만 모두가 침묵했던 영상. 여느 강간 복수극과 달리 <프라미싱 영 우먼>에는 구체적인 피해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영상을 재생하자 마치 쇼를 관람하듯 환호하는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영상을 보며 오열하는 캐시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캐시는 영상에서 남자 친구 라이언의 목소리를 듣는다. 다른 남자와는 분명 다르다고 생각했던, 캐시에게 조금은 삶의 희망을 갖게 했던 소아과 의사. 라이언은 그때는 모두 어렸다고, 자신을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억울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구경꾼도 공범이다. 캐시에게 관용이란 없다. 피해자는 세상을 떠났고 가해자들은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잘 살아간다. 캐시는 제대로 된 복수를 결심하고 알의 총각파티 장소로 찾아간다. 간호사 스트리퍼로 변장한 채.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짧은 치마를 입었던 20대 초반 어느 날이 떠올랐다. 수많은 눈길을 받으며 내 몸이 마치 물건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졌던 날. 다시는 이런 옷을 입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던 날.


여성으로서의 내 몸을 자각한 후  늘 내 몸을 스스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노출이 있는 옷을 입지 않으려 했고 술을 마시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했다. 일상적인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하면서도 단 한 번도 캐시처럼 정색하지 못했다. 혹시 내가 오해한 게 아닐까, 내가 뭘 잘못한 게 아닐까. 나 자신에게서 문제를 먼저 찾았다. 


영화에서 가장 처참했던 장면이 있다. 범죄를 저지르고 겁에 질려 있는 알에게 알의 친구 조는 알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말한다. 

 

이건 네 잘못 아니야. 이건 그냥 사고였어. 


여성들이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는 동안 남성들은 서로가 서로의 다정한 면죄부가 되어준다. 영화의 제목 '프라미싱 영 우먼'은 전도유망한 젊은 여성이라는 뜻이다. 전도유망한 여성이었던 니나의 인권은 남자 의대생들의 전도유망함에 가려져 처참히 짓밟혔다. 성범죄 가해자로 지목되면서 자신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알에게, 캐시는 차가운 얼굴로 말한다. 여자들이 꾸는 진짜 악몽이 뭔지 알기나 하냐고. 



침묵하거나, 미친년이 되거나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인 11일, 문재인 대통령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 부친의 빈소에 근조화환을 보낸 것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왔다. 선거 기간에는 윤석열 당선인의 배우자 김건희씨가 "안희정이 불쌍하다"라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져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쯤 되면 누구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건지 헷갈린다. 권력형 성범죄 가해자를 향한 배려와 공감이 왜 피해자에게는 적용되지 못하는 걸까. 


윤석열 당선인은 '성범죄 처벌 강화'와 '무고죄 처벌 강화'를 나란히 선거 공약으로 내건 바 있다. 대부분의 여성이 성범죄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것조차 어려워하는 상황에서 성범죄 처벌과 무고죄 처벌이 어떻게 동일한 무게로 언급될 수 있는지 황당할 따름이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 김지은씨는 책 <김지은입니다>에서 "그들이 말하는 '가짜 미투'가 도대체 무엇일까"라면서 "우리 한국 사회에서 누가 대체 성폭력을 당했다며 제 인생을 그렇게 해체하면서까지 강간 경험을 내놓을까"라고 반문한다. 


사회적 안전망에 대한 믿음이 무너졌을 때 여성의 선택은 두 가지다. 그냥 침묵하거나, 캐시처럼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를 구하거나. 대선 직후 여성들의 호신용품 검색이 늘어난 것은 결코 과민반응이 아니다. 


영화 마지막, 캐시는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복수를 완성한다.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지만 그렇지 않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아서 더욱 슬프다. 캐시는 정말 미친년일까. 제정신이 아닌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 

취업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지러울 때,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운동을 했더니 삶이 제대로 꼬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