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Apr 12. 2022

'오은영 매직'이 우려스러운 이유

[나를 키운 여자들] <로마> 속 클레오

추억처럼 계속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어떤 상황을 마주할 때 습관처럼 머릿속을 차지하고 마는 영화. 직접 만난 사이도 아니고 직접 겪은 일도 아닌데 마치 내가 그 장면을 살아낸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엄마 7년 차. 엄마로 산다는 건 매 순간 나의 밑바닥을 직면하는 일이다.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부족한지 이기적인지 불안과 공포가 많은지 까발려지는 일. '내가 과연 이 아이를 감당할 수 있을까' 뼛속 깊이 회의하게 될 때,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영화 <로마>가 상영된다. "나는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라며 울부짖던 클레오를, 클레오 품에 엉겨 붙어 함께 울던 아이들을 생각한다.  


영화 <로마>의 배경은 1970년대 멕시코 시티에 있는 중산층 동네 로마다.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는 이 동네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입주 가정부다. 번듯한 2층 주택에 의사 아빠, 화학자 엄마, 할머니, 네 명의 아이, 두 명의 가정부까지. 겉으로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가정은 아빠의 외도로 인해 균열이 생긴다. 캐나다에 출장을 다녀온다던 아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집안 살림을 하며 네 명의 아이를 살뜰히 돌보던 클레오에게도 위기가 찾아온다. "네가 나를 바라봐줄 때 모든 게 명확해지는 것 같다"고 달콤하게 말하던 남자 친구 페르민은 클레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하자 영화관에 재킷을 남겨둔 채 사라져 버린다. 



혼자인 여자들의 연대 

 


▲ 아이는 함께 만들었는데 아이를 책임지는 건 여자들이다. ⓒ 판씨네마㈜

 


영화 <로마> 속 남자들은 무책임하고 비겁하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4남매의 아빠는 생활비도 보내주지 않은 채 시내에서 애인과 해맑게 웃으며 아이처럼 뛰어다닌다. 임신 소식에 줄행랑을 쳤던 페르민은 뻔뻔한 얼굴로 자신은 이 아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다. 그는 요란하게 무술봉을 겨누며 클레오에게 말한다. 

 

너랑 네 배 속의 아이가 처맞고 싶지 않으면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고 나 찾으러 오지도 마. 미친 하녀 같으니.


아이는 함께 만들었는데 아이를 책임지는 건 여자들이다. 클레오가 해고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주인집 사모님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에게 임신 사실을 말하자, 소피아는 클레오의 상황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함께 병원에 가자고 한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으러 가는 길, 소피아는 남편이 남기고 간 고가의 차를 직접 운전한다. 영화 초반, 소피아의 남편이 능숙한 운전 솜씨로 커다란 차를 집 주차장에 아슬아슬하게 집어넣는 모습이 나온다. 애초 집 크기에 맞지도 않았던 화려한 차는 남편의 허영심을 보여준다. 운전이 익숙지 않은 소피아가 불안한 눈빛으로 차를 몰자, 멋진 차는 여기저기 부딪치고 망가진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오며 주차장에 거칠게 차를 밀어 넣은 소피아는 클레오를 끌어안으며 말한다.

 

우린 혼자야.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 여자들은 늘 혼자야.


소피아는 아픔을 추스르고 가장으로서 집안을 책임지려 한다. 클레오는 무거운 몸으로 네 아이를 사랑으로 돌본다. 중산층 백인 여성과 가난한 멕시코 가정부는 서로에게 기댄다. 


생물학적 아버지는 아이를 버렸지만 소피아를 비롯한 주변 여성들은 클레오의 아이를 함께 챙긴다. 클레오와 비슷한 처지에서 일하는 가정부들은 임신한 클레오의 일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 노력한다. 4남매의 할머니는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해 클레오와 가구점을 찾는다.


아기 침대를 사러 가구점에 간 날, 클레오는 민주화 시위를 하는 대학생들에게 총을 겨누는 페르민과 우연히 마주친다. 갑자기 양수가 터져 차 안에서 진통하는 클레오를 위해 할머니는 기도를 해주고 병원까지 함께 가준다.


진료 접수를 위해 간호사가 이것저것 묻지만 할머니는 클레오의 이름 말고는 나이도, 생년월일도, 중간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저 고용주와 고용인 관계일 뿐인데 할머니가 클레오와 아이를 위해 진심을 다할 수 있었던 건 그녀 역시 누군가의 엄마이기 때문이었을까?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여성들은 취약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나는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 아이를 키우면서 클레오의 대사를 자주 떠올렸다. ⓒ 판씨네마(주)

 


분만실로 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클레오는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소피아의 남편을 만난다. 오랫동안 한 집에 살았던 클레오가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그는 클레오의 손을 잠시 다정하게 잡아주고는 선약이 있다며 떠나버린다. 우여곡절 끝에 클레오는 분만을 하지만 아이는 이미 죽은 상태다. 태어나자마자 이별해야 하는 엄마와 딸. 배 위에 죽은 아이를 올려놓고 클레오는 말없이 울기만 한다.  


클레오와 소피아 그리고 네 명의 아이들은 새로운 시작을 위해 바다로 여행을 떠난다. 소피아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두 명의 아이가 파도에 휩싸인다. 머리까지 잠길 정도로 높고 거센 파도를 헤치고, 클레오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휘청대며 걸어간다. 해변으로 나온 클레오의 품에 네 명의 아이가 안겨 울고, 소피아는 클레오에게 고맙다고 한다. 클레오는 울면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원하지 않았어요.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전 아기가 태어나길 원치 않았어요. 가여운 아가…


모든 것을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기만 했던 클레오가 처음으로 솔직한 마음을 입 밖에 꺼낸 순간, 나도 클레오를 따라 울었다. 자신이 낳지 않은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지면서, 클레오는 자신이 낳았지만 살리지 못했던 아이를 떠올렸을 것이다. 아이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 자책했을 것이다. 아이에게 한없이 미안했을 것이다. 이미 클레오는 아이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는데도 말이다. 

 

그 애를 원치 않았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클레오의 대사를 자주 떠올렸다. 많은 엄마가 그렇듯, 나 역시 엄마가 되기 전에는 엄마로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몰랐다. 어떤 날은 엄마로 사는 게 세상 가장 행복한 일인 것 같았다가, 어떤 날은 모든 게 너무 버거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었다. 


그런 날이면 내가 이 아이를 정말로 원했던 게 맞을까, 나는 엄마가 될 자격이 없었던 것 아닐까 의심했다. 모성은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는 걸, 때로는 아이를 사랑하고 때로는 아이를 미워하는 양가적인 감정이라는 걸 깨닫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완벽한 엄마란 존재하지 않으며 엄마도 그저 한 사람의 부족한 인간일 뿐이라는 걸 인정했을 때, 엄마라는 이름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졌다.  



한 아이를 키우는 일 

 


▲ 육아에서 양육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 판씨네마(주)

 


얼마 전 채널A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을 보다가 8살 아이가 엄마에게 무차별적인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장면에서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아이의 행동이 놀라운 것은 둘째 치고, 이런 모습이 반복적으로 전파를 타고 있는 상황이 더욱 놀라웠다. 육아 솔루션이라는 미명 하에 아이의 인권은 전혀 보호받지 못하고 있었다. 


방송에 대한 언론 보도와 댓글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이의 말과 행동이 자극적으로 편집돼서 확대 재생산됐고, 보통 사람들은 만나기도 어려운 전문가에게 육아 처방을 받았으면서 왜 엄마도 아이도 변화가 없는지 비난했다. 그들에게 아이의 잘못은 무조건 엄마 탓이었다. 엄마에게 변화하려는 의지 자체가 없다며 엄마의 태도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있었다. 


나 역시 오은영 박사의 육아법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한두 번의 솔루션으로 단시간에 기적 같은 변화가 일어나는 일은 편집된 방송 속에서나 가능하다. 육아는 인풋이 있다고 해서 아웃풋이 바로 나오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육아에서 양육자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제 몸 하나 못 가누던 아이가 한 사람 몫의 역할을 하는 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육자뿐 아니라 아이 스스로의 의지 그리고 아이를 둘러싼 어른들과 사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클레오가 소피아의 아이들을, 소피아가 클레오의 아이를 지켜주려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극적으로 연출된 '오은영 매직'이 자칫 아이를 키우는 일을 오로지 양육자의 책임으로만 인식하게 만들까 우려스럽다.


다시 바닷가 장면으로 돌아가, 울먹이는 클레오에게 소피아는 말한다.  

 

우린 널 사랑한단다, 클레오. 우리는 널 정말 사랑해.


영화를 보면서 모성애라는 무거운 단어를 인간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이라는 말로 바꿔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여성에게만, 엄마에게만 적용되지 않는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단어로.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 

취업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지러울 때,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



'돌봄'에 대한 고민을 담은 다른 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