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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y 04. 2022

자기 소개하는 게 싫었던 진짜 이유

[나를 키운 여자들] <더 브론즈> 속 호프

영화 <더 브론즈>의 호프 앤 그레고리(멜리사 로치)는 미국 체조 국민 영웅이다. 아니, 영웅이었다. 호프는 2004년 로마 대회에서 심각한 발목 부상을 입은 채 평행봉에 올라 완벽한 연기를 선보였다. 덕분에 호프는 동메달을 땄고, 한 발로 착지해 두 팔을 양쪽으로 쭉 뻗은 채 활짝 웃고 있는 호프의 모습은 '호프의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스포츠 역사에 남았다.


그로부터 12년 후, 왕년의 체조 요정 호프는 자신의 경기 장면을 다시 돌려보며 침대 위에서 자위를 하고 있다. 등에 USA라고 크게 적힌 국가대표 운동복을 입고, 목에는 동메달 목걸이를 걸고서. 절정에 이른 호프는 보석함에 숨겨둔 마약을 트로피로 잘게 부순 뒤 코로 흡입한다. 헤어스타일만 그대로일 뿐 TV 속 앳된 17세 소녀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호프의 기적' 이후 또다시 부상을 당하며 재기에 실패한 호프는 과거의 영광에 취해 살아간다. 선수로 번 돈은 이미 다 써버렸고, 싱글 대디인 아빠에게 용돈을 받아쓰고 있다. 씀씀이를 줄이지 못해 아빠(게리 콜)가 배달하는 우편물을 몰래 뒤져 돈을 훔치기도 한다. 곧 은퇴를 앞둔 아빠는 더는 경제적 지원을 해줄 수 없다며 체육관에서 코치 일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그러자 호프는 5살짜리 아이처럼 짜증 내면서 소리친다.

 

"나는 코치가 아니라 스타예요! <댄싱 위드 더 스타>에 나왔잖아요. <댄싱 위드 더 코치>가 아니라요."



어른이 되지 못한 체조 요정

       


▲ 29살 호프는 여전히 동메달을 땄던 17살에 머물러 있다. ⓒ IMDB



29살 호프는 여전히 동메달을 땄던 17살에 머물러 있다. "영웅들이 입는 옷"이라며 국가대표 운동복을 평상복처럼 입고, 요정의 모습을 잃지 않기 위해 가슴을 테이프로 감고 다닌다. 메달을 딸 때와 똑같은 앞머리 컬과 포니테일도 철저히 유지한다. 호프는 선수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체조 요정은 어른이 되지 못했다.


다행히 호프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인 애머스트에서는 여전히 영웅이다. 애머스트로 진입하는 고속도로 시작점에는 '2004년 동메달리스트 호프 앤 그레고리의 고향'이라는 팻말이 크게 걸려 있다. 덕분에 호프는 피자를 공짜로 먹고 운동화를 공짜로 신고 마약도 공짜로 얻지만 세월이 세월인 만큼 존재감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


한물간 스타가 됐지만 호프는 상황을 비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가슴 한편에 '진지 금지'라도 새겨놓은 듯 시종일관 냉소적인 말투로 독설을 쏟아낸다. 말끝마다 욕설에 성적 농담도 서슴지 않는다.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다.


어느 날 호프는 자신을 지도했던 코치인 파블렉 코치(아래 피 코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뉴스를 본다. 호프와 피 코치는 애증의 관계다. 피 코치는 재활 때문에 오랜 공백기를 보내고 돌아온 호프에게 신체 균형이 무너졌다며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말했고, 호프는 그런 피 코치를 원망하며 연을 끊었다. 피 코치의 사망 소식에도 호프는 감정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며 위악을 부린다.


얼마 후 피 코치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피 코치가 호프를 위해 유산 50만 달러(약 6억)를 남겨 놨으며, 이를 상속받기 위해서는 피 코치가 지도하고 있던 체조 유망주 매기 타운센드가 토론토 대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호프가 매기를 지도해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돈이 필요했던 호프는 매기의 코치가 되기로 한다. 호프처럼 애머스트 출신인 매기는 어린 시절 호프의 모습을 보면서 체조 선수의 꿈을 키워왔다. 매기에게 호프는 아이돌이다. 망해가는 낡은 동네 체육관에서 호프와 매기 그리고 체육관 주인 아들 밴은 함께 훈련을 한다.


호프는 처음에는 매기에게 애머스트의 영웅 자리를 뺏기게 될까 두려워한다. 매기에게 일부러 열량 높은 음식을 잔뜩 먹이고 연애를 장려하고 운동을 게을리 시킨다. 기대주였던 매기는 순식간에 망가진다.



'기자물' 빼는 시간

       


▲ 망해가는 낡은 동네 체육관에서 호프와 매기 그리고 체육관 주인 아들 밴은 함께 훈련을 한다. ⓒ IMDB


 

과거에 머물러 있는 호프의 모습을 보면서 9년간 기자로 일하다 처음 이직했을 때가 떠올랐다. 스타트업에서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회사에 요청한 것은 HWP 프로그램을 사달라는 것이었다. 글쓰는 사람은 HWP를 써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지금이야 중요한 것은 어디에 글을 쓰느냐가 아니라 어떤 글을 쓰느냐이며 동료들과 협업하기 편한 툴을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만 해도 '그래도 내가 기자였는데'라는 마인드가 강했다. 마케팅을 위해 인스타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면서도 '그래도 내가 기자였는데 인스타 콘텐츠나 만들다니'라는 자괴감이 들었다. 콘텐츠를 접할 고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자기 만족을 위한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일하는 분야도, 환경도 모두 바뀌었는데 과거의 나를 기준으로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를 그었다.


그 후 몇 번의 이직을 거쳤고, '기자물'을 빼는 데는 꽤 시간이 걸렸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기 소개할 때면 자꾸만 "제가 원래는 기자였는데요"로 말을 시작했다. 어느 언론사에서 일하는 기자라고만 설명하면 충분했던 과거와 달리 새롭게 시작한 일들은 좀 더 자세한 맥락 설명이 필요했다. 소개를 하면서도 상대방이 과연 제대로 이해할까, 나를 별 볼일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면 어쩌지 움츠러들었다. 그때 전직 기자라는 타이틀은 든든한 방패막이었다. 기자라는 두 글자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사람 마음이 참 얄궂게도, 정작 기자로 일했을 때는 기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회사 이름이 곧 내 정체성처럼 인식되는 것도 싫었다. 오랫동안 다닌 회사를 떠나 스스로 길을 개척하면서 나만의 정체성을 만들고 싶었다. 새로운 일은 흥미롭고 재밌었지만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불확실하고 불안정했다. 익숙한 일과 조직이 주는 안정감이 때때로 그리웠다. '나도 호프처럼 과거에 갇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영화를 보는 내내 뜨끔했다.


호프는 차츰 코치로서의 면모를 찾아간다. 운동 지도는 물론이고 식단 관리, 멘탈 관리, 심사위원에게 존재감을 어필하는 법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준다.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속상해 하는 매기에게 호프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지 마, 알겠어? 그건 내가 할 일이야."


'체조 선수랑 한번 자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접근해오는 남자들만 만나던 호프에게, 밴은 "너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다"고 말해준다. "너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호프는 처음으로 머리를 풀고, 가슴을 감추고 있던 펑퍼짐한 운동복을 벗는다.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것

       


▲ 메달만이 삶의 목적이 됐을 때 메달을 딸 수 없는 삶은 무의미해진다. ⓒ IMDB


 

매기와 함께 토론토 대회에 간 호프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피 코치가 보낸 편지는 사실 호프의 아빠가 쓴 것이며 50만 달러 유산 따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아빠는 이렇게 말한다.  

 

"더 늦기 전에 누군가 네가 쌓은 담을 허물어야 했어.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겠구나. 전혀 미안하지 않아. 넌 코치 일에 재능이 있어."


배신감에 절망하던 호프는 그럼에도 자신의 역할을 다하기로 한다. 이때 연출이 인상적이다. 마루에서 멋진 연기를 펼치는 매기를 배경처럼 지켜보고 있는 호프. 매기의 연기가 끝나자 호프 뒤에 있던 관중들은 열광한다. 호프는 슬픈 것도 기쁜 것도 아닌 표정을 짓는다.


이어 점수가 발표되고 매기는 금메달을 딴다. 모든 관심은 즉시 매기에게 쏠리고 누구도 호프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호프는 쓸쓸한 모습으로 경기장을 떠난다. 애머스트의 수식어는 '금메달리스트 매기의 고향'으로 바뀐다.


호프는 그제야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이제 주인공은 매기이며, 자신은 선수가 아니라 코치라는 것을. 호프는 코치로서의 인생 2막을 시작하며 밴을 도와 체육관을 살리기로 한다. 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로 호프는 밴에게 말한다.

 

"나처럼 메달을 딴 사람은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 하지만 너랑 함께 한 순간들은 항상 메달을 땄을 때보다 좋았어. "


너무 일찍 최고의 순간을 맛본 호프에게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순간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메달만이 삶의 목적이 됐을 때 메달을 딸 수 없는 삶은 무의미해진다. 시니컬한 표정과 말투는 그녀만의 방어기제였을지 모른다.  


현실을 인정하고 초라함을 받아들였을 때 호프는 비로소 17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과거가 아닌 현재를 살기로 했을 때 호프는 메달을 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은 메달보다 훨씬 크다는 것도.  


호프가 국민 영웅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했던 것처럼 내게도 남들에게 그럴듯한 사람으로 보이고픈 욕망이 있었다. 자기 소개하는 게 늘 힘들었던 이유다. 하지만 남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의 자기 소개에 관심이 없으며, 과거의 이름에 얽매여서는 현재를 살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 삶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느냐다. 내 삶을 믿기 위해서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하루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를 보면서 여러 얼굴이 떠올랐다. 틈만 나면 '내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데', '내가 어느 회사를 다녔는데' 자랑하는 사람, 빛나는 시절은 모두 과거 시제인 사람, 현재에 좀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 미래도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 같은 사람. 호프도,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에는 아직 살아갈 날이 새털같이 많다.


호프는 밴과 함께 체조 교실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아이를 가르친다. 그 아이들 중 누구도 올림픽은커녕 국가 선수권 대회도 나가지 못한다. 하지만 호프는 지금을 살아간다. 지금의 호프로도 충분하다고 말해주는 사람과 함께.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

취업하고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자연스럽게 어른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여전히 어떻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어지러울 때,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 뿌옇던 세상이 조금은 선명해졌습니다.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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