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빌리와 피터에게 배운 것
마지막까지도 퇴사를 고민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남들의 시선이었다.
“남편이 돈 좀 버나 보네?”
“거봐, 결국 애 때문에 쩔쩔 매다 일 그만두잖아.”
“이제 집에서 애 보고 살림하는 거야?”
기자가 아닌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고, 이 회사를 떠나고 싶다고 그토록 오래 생각했건만. 막상 현실로 다가오자 미련이 남았다. 기레기니 뭐니 해도 기자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이었고, 지난 9년간 회사는 나를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수식어가 되어있었다.
내 이름에서 회사와 직업을 뗀다면 나는 나로 존재할 수 있을까. 앞으로 비행기 타면 직업란에 뭐라고 적어야 하지. 프리랜서, 작가, 주부?
어렵게 퇴사를 결심한 후에도 나는 내 퇴사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썼다. 어지럼증으로 머리가 핑핑 돌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도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애 때문에 그만두는 게 아니라고, 꿈 때문에 그만두는 거라고. 난 행복하다고^^
왜 그리 애썼을까. 왜 그리 포장하고 설명하려 했을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말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고. 퇴사의 ‘결정적’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애 때문이 아니라고 핏대를 세웠지만 아이도 하나의 이유였다. 직장맘으로 살아가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으니까. 여러 복합적 이유가 쌓이고 쌓였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꼈을 때 퇴사를 택한 것뿐이다.
퇴사 후 새로운 일을 하면서도 이걸 남들에게 어떻게 설명할 것인지 계속 생각했다. “월급은 나와?”“그게 돈이 될까?”“일은 어디에서 하는 거야?”라는 질문 앞에 의기소침해졌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퇴사의 과정을 그럴 듯하게 설명하고 싶은 욕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퇴사는 남들과 다르다고. 난 특별한 사람이라고.
영화 <머니볼>을 다시 봤다. 돈은 없고 그나마 실력 있는 선수는 돈 많은 구단에 다 뺏긴 야구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단장 빌리(브래드 피트)는 경제학을 전공한 피터(조니 힐)를 영입해 기존과는 전혀 다른 선수 평가·운용 방식을 시도한다.
그 다음 상황은 예상 가능하다. 모두가 그게 되겠냐고, 실패할 거라고 저주를 퍼붓고 심지어 감독조차도 빌리의 방식에 반기를 든다. 이대로라면 새로운 방식은 시도도 못 해볼 상황.
빌리는 특단의 조치를 취한다. 감독이 자신의 방식을 따를 수밖에 없도록 선수를 트레이드 해버린 것이다. 남들에게 뭐라고 설명할 거냐고, 그러다 해고된다고 걱정하는 피터에게 빌리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 말이 맞아. 해고될 수도 있지. 그럼 난 대학에 보내야 할 딸을 가진 44살의 고졸 실직자가 되겠지. 자넨 실전 경험 많은 25살의 예일대 졸업생이고.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야. 우리가 고민해야 할 문젠 이 방법을 믿느냐야. 우리의 방식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려고 하지마. 누구에게든.”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을 굳이 남에게 설명하고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내 인생에 관심이 없다. 한번씩 지나가는 말로는 물을 것이다. “그래서, 걔는 잘 살고 있대?” 딱 그 정도의 관심. 중요한 건 내 자신이 이 방법을 믿느냐다.
결국 빌리의 방식은 통하고 애슬레틱스는 20연승을 거둔다. 기록을 세운 것이다. 이 때 빌리의 명대사.
“피터, 난 긴 세월 야구에 몸 담아왔어. 하지만 기록 따위엔 관심 없어. 챔피언십에도. 상처받기 쉽거든. 시리즈 마지막 경기에 패하면 다들 유령 취급해. 난 저들의 생리를 알아. 언제 봤냐는 식이라고. 우리가 이룬 모든 게 다 무의미해져.
딴 팀이 우승하면 그것도 좋은 거지. 샴페인을 마시고 반지도 받겠지. 하지만 우리 같은 가난한 구단이 우승하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어. 내가 원하는 건 그거야. 난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
‘난 변화를 일으키고 싶어’라는 대사를 몇 번이나 따라 읊조렸다. 빌리의 말처럼 기록과 성과에 집착하면 상처받기 쉽다. 숫자가 모든 걸 집어 삼키니까.
실제로 애슬레틱스가 결국 시리즈에서 우승하지 못하자 그토록 열광하던 사람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을 바꾼다. 역시 실패할 줄 알았다며.
결과적으로 빌리와 피터의 도전은 야구사에 길이 남을 변화를 이끌어낸다. 세상에는 숫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내가 선택한 방식을 믿는 것 그리고 빌리와 피터처럼 끝내 변화를 일으키는 것. 나도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덧)1년 전, 한글 파일에 써둔 글을 찾아서 다시 읽는다. 1년이 지나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이 글은 내게 유효하다. 많은 것이 달라져도 끝내 달라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원본을 그대로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