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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May 13. 2022

일 경험 기록은 왜 힘들까?

소몰이하듯 글쓰기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빠졌다.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인물들이 철학적인 대사를 내뱉는데 위화감이 전혀 없다. 그만큼 작가가 대사를 잘 썼다는 이야기겠지.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고. 요 며칠 극 중 염미정(김지원)의 대사가 계속 맴돌았다.


“그래도 소몰이하듯이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은 단정하게 가보자. 그렇게 하루하루 어렵게 어렵게 나를 끌고 가요.”


이번 주에는 그동안 써야지, 써야지 다짐하던 글을 드디어 썼다. 이번에는 진짜 써야 한다고 소몰이하듯 나를 어렵게 어렵게 끌고 갔다. 두 번째 회사를 다닐 때 일 경험에 대한 글이다. 초고 앞부분을 써둔 게 두 번째 회사를 그만뒀던 2년 전이었는데 좀처럼 진도가 안 나갔다.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수십 번. 그렇다고 안 쓰자니 마음 한 구석이 찝찝했다. 이 경험을 정리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일 경험을 기록해야겠다고 매번 다짐하는데 매번 쉽지 않다. 일에 대한 글을 쓰기 어려운 이유는 일이 일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정은 “모든 관계가 노동”이라고 했는데 모든 노동 곧 관계이기도 하다. 일의 결과 이면에는 그 일을 함께 했던 사람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어젠다 하나를 놓고 씨름했던 기억, 말 하나 행동 하나에 힘이 생기기도, 마음이 상하기도 했던 기억, 성과가 났을 때 함께 환호했던 기억, 반대로 생각만큼 성과가 나지 않았을 때 실망했던 기억. 긴장, 불안, 설렘, 보람… 일에 대한 글을 쓰다 보면 그때의 기억과 감정이 모두 함께 딸려온다. 일은 끝나도 감정은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버겁다. 그러고 보니 첫 번째 회사를 다닐 때 기록도 거의 없다.


관계가 떠오르면 자꾸만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마치 나 혼자 잘나서 한 일인 것처럼 읽히면 어쩌지’, ‘나는 이 일에서 내 역할이 이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동료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별 일도 아닌데 큰 일처럼 부풀리는 건 아닐까'. 어떨 때는 사기꾼이 된 것 같았다가 요즘은 퍼스널 브랜딩 시대라는데 왜 나는 좀 더 뻔뻔하고 당당하지 못할까 답답하다. 이것저것 고려하다 보면 글은 두루뭉술해지고 시상식 소감처럼 지루해진다.


그렇다고 일 기록을 마냥 미룰 수는 없다. 오래 묵힌 글에서는 사골 냄새가 난다. 디테일은 사라지고 느낌적인 느낌만 남는다. 이번에 글을 쓰면서도 왜 진작 정리를 안 했을까 후회했다. 반대로 그때그때 기록을 남기자니, 나는 계속 변하는데 설익은 생각을 공개적으로 박제해 놓는 것 같아 영 부끄럽다. 좀 더 정리가 된 사람, 통찰력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 때문이다. 매일 글 쓰는 사람, 브이로그를 찍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고 한다면, 그래도 나의 속도로 계속 쓰는 수밖에 없다. 경험을 완벽하게 소화해 글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공명 정대하게 일 경험을 기록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잘 쓰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그저 지금의 나는 이만큼, 이 정도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내 일 기록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일했던 마음이 흐릿해지기 전에 부지런히 과거와 현재의 일을 기록해야겠다. 지나간 경험을 정리해야만 “사는 동안은 단정하게" 다음을 준비할 수 있을 테니까. 쓰고 보니 이건 일 기록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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