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초심
“잘 드는 가위가 필요해.”
일주일 방학이 끝나고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월요일, 아이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스케치북에 연필로 하트를 그리더니 가위로 자르고 테이프를 뜯어 종이를 이어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 다이소에서 친구들과 나눠 가질 거라며 샀던 장난감 반지를 포장하는 소리였다.
“이 반지를 친구들이 좋아할까?”
“친구들한테 먼저 고르라 그러고 나는 제일 나중에 고를 거야.”
포장을 마친 아이는 스케치북을 한 장 더 북 찢더니 내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 여기에 ‘얘들아 사랑해’라고 써줘.”
스케치북에는 하트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날날이가 직접 써보면 어때?”
”나 ‘얘들아’ 못 쓰는데.”
”엄마가 도와줄게.”
‘얘들아’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서 ‘친구들아 사랑해’로 문구를 바꾸고 아이에게 쓰는 법을 알려줬다. 크기 조절을 잘 못해서 ‘친구’ 두 글자만 썼는데도 하트가 꽉 찼다. 아이는 아끼는 반짝이 색종이를 가져오더니 여기에 다시 글씨를 써보겠다고 했다. 편지 쓰기까지 마친 아이는 빨간 가방에 선물을 챙겨 넣고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이번 여름 방학은 공동육아 어린이집 식구들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친구들과 함께 노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과 몇 번이나 ‘이제 정말 다 키웠다’는 말을 했다.
아이는 잘 먹고 잘 자고, 친구들과 충돌이 있기는 했지만 서로 대화하고 조율하며 잘 놀았다. 밥 차려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딱히 어른이 개입할 일이 없었다. 다른 7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바다에서 어른들도 수영하며 아이처럼 신나게 놀 수 있었다. 4살, 5살 동생들과 함께 놀러 간 날, 동생들과 함께 있는 모습들 보니 7살이 어찌나 크고 의젓해 보이는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었다.
방학 중 하루는 레고랜드에 갔다. 마지막 코스로 드래곤 코스터를 탔는데 거꾸로 뒤집히는 구간은 없지만 그래도 걱정됐다. 타기 싫다고 하지 않을까, 무섭다고 울지 않을까. 웬걸. 이번에도 아이는 용감하게 잘 탔다. 나중에 드래곤 코스터 소리만 나와도 심장이 아프다고 하기는 했지만. 아이는 이제 더 이상 돌보고 챙겨줘야 할 아기가 아니었다.
아이가 7세가 되자 나는 괜스레 비장해졌다. 초등학교 가기 전 아이와 최선을 다해 열심히 놀아야 한다는 한량의 마음과 그래도 초등학교 갈 준비는 차근차근해둬야 한다는 모범생의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초등학교는 어린이집과 다르다는데, 공교육 시스템 속에서 아이가 받게 될 평가가 꼭 내 성적표가 될 것만 같았다. 평균, 정상이라는 범주에 아이가 잘 있는지 불안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부족한 게 뭔지, 개선해야 할 게 뭔지 마음속에 평가 항목을 두고 감시관처럼 관찰했다.
얼마 전 메일함 정리를 하다 5년 전, 지금 아이가 다니고 있는 또바기 공동육아 어린이집 입학 면접을 볼 때 작성했던 면담지를 발견했다.
“날날이는 돌잡이를 따로 하지 않았습니다. 명주실만 올렸습니다. 건강하면 뭐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건강하고 즐겁게. 우리 부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입니다. 공부 잘해서 좋은 학교, 좋은 직장에 들어가고... 이런 세속적인 가치들이 행복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는 걸 너무도 잘 아니까요. 많은 것을 편견 없이 보고 듣고 느끼고 몸으로 경험하면서 날날이가 자신이 뭘 원하는지, 어떻게 살 것인지 주체적으로 고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경험과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도 만났으면 좋겠고요.”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답을 주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현실 앞에서 초심은 초라해지기도 하고 민망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초심은 현실 따위에 상관없이 순수했던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초심은 현실에 흔들리는 내게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 ‘이것 봐, 너 원래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잖아’ 하고. 5년 전 육아를 처음 시작할 때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원 시간에 아이를 데리러 가자 아이를 포함해 3명이 쪼르르 남아 있다. 같은 방 친구들이다. 친구의 손에 과일 모양 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에게 물어보니 모두 하나씩 반지를 나눠 가졌고 남은 3개는 선생님들에게도 줬단다. 아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말해준다.
사랑한다는 마음을 사랑한다고 표현할 줄 아는 마음, 혼자 반짝이는 것을 갖는 것보다 함께 나누는 것이 더 즐거운 마음. 돌이켜 보면 나는 그런 마음에 참 서툰 어린이였는데 아이는 어릴 때의 나보다 훨씬 멋진 어린이로 성장하고 있다.
아이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걸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두려운 것은 아이의 보석 같은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사회는 아이를 평균과 정상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부모는 사회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봐야 하지 않을까. 흔들릴 수는 있어도 휩쓸리지는 말아야겠다고,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