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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l 05. 2022

'될놈될'이라는 오만

한글이 이렇게 어렵다니

7살 날날이는 아직 한글을 모른다.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낼 때만 해도 ‘초등학교 가기 전까지는 신나게 놀았으면 한다'는 생각이 컸다. 인지교육? 그거 다 부모 욕심 아니야? 


그때만 해도 몰랐다. 내 아이가 7살이 돼도 한글을 모른다는 게 어떤 심정인지. 


날날이는 “나 잘 못하는데…”라는 말을 자주 하는 아이다. 익숙하지 않거나 잘 못한다고 생각하면 급격히 자신감이 떨어지면서 주눅이 든다. 잘 못해도 뻔뻔하게 “나 해볼래" 나서는 아이가 있다면, 날날이는 잘 못한다고 생각하면 뒤로 숨는 아이다. 집에서도 어린이집에서도 날날이에게 제일 자주 하는 말은 “해보지도 않고 못한다고 말하는 건 멋지지 않아"“일단 한번 해보자"이다. 


6살이 되면서 같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다니는 날날이 친구들이 하나둘 한글에 관심이 생겼고 대부분 한글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날날이는 “나만 글씨 못 써”라는 말을 자주 했다. 담임교사는 날날이가 자신감이 너무 떨어져서 아예 안 하겠다고 할 수도 있으니 집에서라도 한글을 조금씩 알려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인내심이 있는 남편이 한글 교육을 맡기로 했다. 한글 교재를 사서 공부를 시작한 지 며칠은커녕 몇 분도 안 돼서 남편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너 하기 싫어?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이거 엄마 아빠 좋으라고 하는 거 아니야!” 막장 드라마도 아니고 이 대사를 남편이 뱉고 있을 줄이야. 


한글 교육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아이는 집중을 못하고 계속 드러눕고 몸을 오징어처럼 배배 꼬았다. 분명 방금 했던 건데도 다시 물어보면 기억을 못 했고 자꾸만 언제 끝나냐고 물었다. 건성으로 슥슥 대충 글자를 따라 썼다. 방금 전까지 포켓몬 동영상은 그렇게 열심히 보더니… ‘공부하기 싫을 때 하는 행동' 같은 게 인류 유전자에 공통으로 새겨져 있기라도 한 걸까. 


남편이 나가떨어지자 이번에는 내가 나섰지만 나라고 별 수 있나. 뽑기에 빠져서 동전을 모으는 아이에게 “이거 3장 같이 하면 100원 줄게" 회유도 해보고, “초등학교 간 OO 누나가 그러는데 한글 모르고 학교 가면 엄청 힘들대" 겁박도 해보고, “OO도 한글 알고, OO도 한글 아는데 너만 몰라도 괜찮아?”라며 아이의 경쟁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아이는 찔끔 따라오나 하더니 그뿐이었다. ‘화내지 말자, 짜증 내지 말자' 다짐하며 하루치 공부를 끝내면 그다음 날은 나부터 하기 싫었다. 또 아이와 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하기 싫어하는데 굳이 시켜야 하나'라는 마음도 있었다. 


소근육 발달이 느려서 6세 중반까지 선 긋는 것도 잘 못하던 아이는 어느 순간부터 그림 그리기에 흥미가 생기더니 지금은 그림 그리기를 진심으로 좋아한다. 곤충 박물관에 다녀와서 며칠 동안 나비를 수십 마리 그리고 오리고 붙이며 자신만의 작품을 만드는 아이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 아이에게는 이 아이만의 속도가 있구나. 한글도 마찬가지 아닐까. 흥미가 생길 때까지 계속 적절히 자극을 주면서 기다리면 되지 않을까. 


어느덧 7세 중반. 한글 공부를 하다 말다 하는 사이 아이는 한글에 관심이 생겼고 제 이름을 포함한 몇몇 글자는 읽고 쓸 수도 있게 됐지만 여전히 ‘ㄱ’과 ‘ㄴ'도 구분 못 한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게 이런 걸까. 학창 시절 앞부분만 새까맸던 수학책이 떠올랐다. “그… 소리에다가 오…소리가 붙으면 어떤 소리가 나지?” 아무리 말해봐도 “고"라는 답이 안 나온다. 집에 놀러 온 같은 방 친구가 날날이에게 포켓몬 도감을 읽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남들처럼 키우고 싶지 않아서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 놓고 마음 한편에는 ‘그래도 기본은 하겠지'라는 마음이 있었다. ‘될놈될', 될놈은 되겠지. 공부할 놈은 하겠지. 그 될놈에 내 아이도 당연히 포함될 거라는 생각. 그 생각부터 오만이었다. 내 아이가 ‘될놈'이 아니어도 과연 나는 초연할 수 있을까. 공부 그까짓 거 못해도 된다고 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여유 있게 아이를 기다려주지도 못하고, 독하게 아이를 잡고 공부시키지도 못하고. 고작 한글에도 이렇게 중심을 못 잡는데 초등학교에 가서는 어떨지.  


오늘도 남편은 아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화를 냈고 아이는 아빠가 밉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잠이 들었다. 아이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엄마는 이랬다가 아빠는 저랬다가, 공부를 시킬 거면 꾸준히 시키든지 아니면 그냥 내버려 두든지. 


잠들기 전, 아이를 끌어안고 말했다. 


“날날아, 아빠도 속상해서 그런 거야. 지금 밖에서 울고 있을 걸? 엄마 아빠가 날날이한테 화내서 미안해. 그런데 날날아, 한글 안 배우고 학교 가면 힘들다는 이야기 들었지?” 

“(지겹다는 듯) 나도 알아.” 

“날날이 한글 배우는 거 싫은 거 아는데, 7살은 학교를 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시기이기도 해. 양치하는 것처럼 한글도 배워야 해.”


아침이면 새 사람이 된 듯 개운하게 잠을 자고 일어나는 아이가 신기할 때가 있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것만으로 충분하던 아이에게는 양치처럼 해야 할 일이 하나둘, 수십, 수백 가지 늘어날 것이다. 아침마다 100% 에너지로 하루를 시작하던 아이는 언젠가 나처럼 자도 자도 피곤한 어른이 될 것이다. 꿈에서도 일을 하고 걱정을 할 것이다. 잠 한번 푹 자보는 게 소원이 될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런 어른이 되어가는 걸까. 


날날이는 아무 대답이 없더니 끝말잇기를 하고 싶다고 했다. 기차-차박-박수-수정-정답… 아이는 더는 단어를 잇지 못하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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