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밀밀 Aug 11. 2022

박은빈을 믿어보길 잘했다

크레셴도가 시작되는 순간

 일을 앞두고 마음이 자꾸만 체한  같은 날들이다. 내가 어찌할  없는  앞에서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기다리는 것뿐이다. 이럴 때면 삶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만 같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뒤늦게 봤다. 박은빈 배우 작품은 믿고 보는데 전개가 느린 작품이라고 해서 망설였다가 그래도 박은빈을 믿어보기로 했다.


바이올린을 좋아하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송아@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답답한 드라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스물아홉 클래식 음악학도들. 학생과 어른의 기로에 경계에 있는 청춘에겐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투성이다.


경영대를 졸업하고 4수 끝에 바이올린 전공으로 음대에 입학한 송아(박은빈)는 아무리 노력해도 꼴찌를 벗어날 수 없고, 월드 클래스 피아니스트 준영(김민재)은 아들의 재능을 담보 삼아 자꾸만 사고를 치는 아버지 때문에 피아노를 치는 게 행복하지 않다.


음악뿐만 아니라 사랑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자신의 마음을 그저 삼키기만 하는 준영의 모습은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인 클라라를 평생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브람스와 겹쳐진다. 송아 역시 우정을 잃게 될까 봐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음악, 사랑, 우정. 내 마음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다. 심지어 내 마음조차도 내가 어찌할 수 없다.


오해받고 모욕당하고 상처 입고. 퍽퍽한 고구마를 삼킨 듯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는 드라마를 보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부당한 말들에 사이다 같은 일침을 가하고, 반짝이는 기지를 발휘해 상황을 말끔히 해결하는 일은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진심을 다해 묵묵히 노력하면 뭐든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은 누군가에게 희망고문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애써도 어쩔 수 없는 것들 속에서 송아와 준영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낸다. 한 걸음 한 걸음, 서로에게 기댄 채.


전개는 고구마인데 로맨스는 세상 달달하고요


이 드라마는 시련을 극복하고 성공하는 이야기보다는 시련을 온몸으로 겪으며 포기하는 이야기에 가깝다. 송아는 바이올린을 그만두고 준영은 콩쿨에 나가기를 그만둔다. 해야만 했던 것들,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들과 헤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며 뭉근하게 힘이 났다. 포기하기를 선택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안 되는 일을 기어코 해내는 것이 아니라 안 되는 일을 내려놓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진심과 노력만으로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란, 서른아홉에게도 어렵다.


드라마에는 닮고 싶은 멋진 어른이 여럿 나온다. 그중 송아와 준영의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는 차영인(서정연)의 대사는 오래 기억하고 싶다.


“송아씨. 음악 용어 중에 크레셴도라는 말... '점점 크게'라는 뜻이잖아요. 점점 크게라는 말은 반대로 생각하면, 여기가 제일 작다는 뜻이기도 해요. 여기가 제일 작아야 앞으로 점점 커질 수 있는 거니까. 15년 전에 내가 우리 재단 면접 봤을 때 이사장님이 해주셨던 말씀이에요. 그때 나는 피겨 그만두고 자신감이며 자존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이사장님이 이 말씀을 해주셨었어요. 내가 제일 작은 순간이, 바꿔 말하면 크레셴도가 시작되는 순간이 아니겠냐고요.” -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중에서


한없이 작고 초라한 나를 견디는 것도 어른의 일이겠지. 역시 박은빈을 믿어보길 잘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출간 계약을 알리는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