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라는 초조한 마음 그리고 <애프터 양>
시가에 갔던 남편과 아이가 돌아왔다. 일요일 아침, 다음 주 이사를 앞두고 아침부터 남편은 땀을 뻘뻘 흘리며 집 정리를 하고, 아이는 식탁 위에 종이접기 책을 펼쳐 놓고 종이를 접고 있다.
남편과 아이가 없는 사이 종일 집 정리를 했던 나는 오늘 아침은 게으름을 피운다. 블랙핑크, 뉴진스, 소녀시대, 아이브까지. 음악을 틀 때마다 아이가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는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랑스럽다. 흥이 많은 아이는 어느새 식탁 의자 위에 올라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춤을 춘다.
혼자 보낸 1박 2일 동안 영화 <애프터 양>을 두 번째로 봤다. 애프터 양은 끝에서부터 시작되는 영화다. 중국인 입양아 미카를 위해 구입했던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작동을 멈춘 후 미카의 아빠 제이크는 양의 몸속에서 기억 저장 장치를 발견한다. 양은 하루에 몇 초씩 기억을 저장해뒀다. 양이 기록한 기억은 대수롭지 않은 것들이다. 푸른 잎들 사이로 비치는 하늘, 불을 꺼둔 방안에 비치는 햇살, 흔들리는 빨래, 서로 기대앉아 있는 제이크와 카이라의 뒷모습, 귀여운 춤을 추는 미카,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에서 노래를 따라 부르는 에이다, ‘릴리슈슈’라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미소 짓는 양 자신. 사소하지만 아름답다고 부를 수밖에 없는 삶의 찰나들이 양의 기억 장치 속에 켜켜이 쌓여 있다.
안식년을 보낸 지 8개월이 넘었다. 8월 말 이사와 장기 여행이라는 꽤 큰 이벤트를 앞두고 7월부터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았다. 돌이켜 보면 건강 문제도 있었고 이사 갈 집을 알아보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빼는 과정에서 속앓이를 하기도 했다. 좀처럼 한 가지에 마음을 쏟기 어려운 날들이었다.
무엇보다 마음을 괴롭힌 건 ‘벌써’라는 초조한 마음이었다. 지난해 비행기 티켓을 미리 끊어놓을 때만 해도 9월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올해 초 안식년을 시작할 때도 9월은 까마득했다. 그런데 벌써 9월이라니. 머릿속은 어느새 여행을 다녀온 10월까지 앞질러 가있었다. 컵에 물이 ‘반이나’ 남았네가 아니라 ‘반밖에’ 안 남은 것 같아 불안했다. 7월과 8월과 9월은 없는 사람처럼 마음이 메말랐다.
불확실성과 예측 불가능성을 지독히 싫어하는 성향은 현재가 아닌 미래를 살게 했다. 경우의 수를 짚어보고 꼼꼼하게 시뮬레이션하는 습관은 안전한 결과물을 만들어 냈지만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하게 했다. 더 잘할 수 있었던 과거와 더 잘 해내고 싶은 미래가 현재를 잠식했다. 지난해부터 그토록 기다리던 여행이었는데, 9월이 오는 게 설레기보다는 두려웠다. 얼마 전 이번 여행에서 뭐가 가장 기대되냐는 남편의 질문에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 나는 자꾸만 여행의 시작이 아닌 여행의 끝을 떠올리는 걸까.
“저는 괜찮아요.
끝에 아무것도 없다고 해도요.”
양은 카이라에게 말한다. 끝이 곧 시작이 아니어도, 끝에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끝과 시작이라는 거대함에 매몰되면 끝과 시작 너머에 있는 것들을 놓치기 쉽다. 양의 스위치는 꺼졌지만 양이 사랑했던 순간들은 여전히 반짝이고 있다.
나도 양처럼 하루의 단 몇 초를 기록할 수 있다면 어떤 순간을 담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 이 순간이야’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행복한 시간을 떠올린다. 현재에 발을 딛고 있어야만 오롯이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을. 오마이걸의 <리얼 러브>를 들으며 ‘구름은 어떤 맛일까?’라고 묻는 아이의 말을 기록하며, 오늘의 아름다움을 저장한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