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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17. 2023

<나를 키운 여자들>을 소개합니다

첫 에세이집이 나왔습니다

@느린서재


저의 첫 에세이집 <나를 키운 여자들>이 드디어 나왔습니다. 지난 4년간 <브런치>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에세이를 다듬고 엮었는데요. 개고 과정에서 완전히 새롭게 쓴 원고, 공개되지 않은 원고도 있어요.

<나를 키운 여자들>은 32편의 영화와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를 통해 한국에서 30대 여성으로 살아가는 제 삶을 들여다본 책이에요.


엄마, 딸, 아내, 며느리, 여성 노동자, 여성 시민... 수많은 정체성 속에서 혼란스러울 때마다 꺼내본, 고르고 고른 소중한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영화 리뷰도 비평도 아니고 에세이예요. 일에 대한 고민, 관계에 대한 고민, 엄마로, 딸로, 아내로, 여자로 살아가는 고민, 무엇보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지난번 <큰일은 여자가 해야지> 팟캐스트 녹음할 때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그것도 이렇게 '이상하고 뒤틀린' 여성 캐릭터를 모으게 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요. 조금씩 미쳐 있는 여자들을 통해서 누구보다 이해하고 싶었던 건 제 자신이었어요. 책을 쓰는 동안 오랫동안 나 자신을 인정하지 못했던 나에게, 제 주변에 있는 여자들에게 좀 더 다정해지고 싶어졌어요.


이 책을 읽고 여러분도 '조금 미친 채로 살아가도 괜찮다'라고 위안을 얻는다면, 이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이야기를 고백하고 싶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아요.


아래는 책 프롤로그입니다.


친애하는 나의 '미친 여자'들에게


뒤늦게 찾아온 질풍노도였다. 4년간 세 번의 퇴사를 했다. 9년 동안 잘 다녀온 첫 회사를 그만뒀고, 창업을 위해 그다음 회사를 그만뒀고, 마지막으로는 창업했던 회사에서 나왔다. 4년 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다면 6년 전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2016년, 한 아이의 엄마가 됐다. 물리적으로 사회적으로 내가 여자라는 것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된 해였다. 엄마가 되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이제껏 당연하게 몸담고 있던 세상이 낯설어졌다.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양육과 가사의 부담을 더 많이 짊어져야 하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과 육아 중에서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받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일터에서 더 많은 감정 노동을 감당해야 하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밤길에 무사히 집에 돌아갈 것을 걱정해야 하는지, 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범죄 피해를 당하고도 자기 검열을 먼저 해야 하는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받아들여왔던 세계가 모조리 부서지고 깨졌다.



내 안에 미친년


지금까지 세상이 정해둔 기준에 맞춰 모범생처럼 착실히 살아왔다면 앞으로는 내 인생의 방향 키를 내가 쥐고 살아가고 싶었다. 엄마, 아내, 딸, 며느리, 여성 노동자, 여성 시민 등 내게 주어진 모든 정체성을 뒤집어엎고 싶었다. 굶주린 사람처럼 ‘지금과는 다른 나’, ‘지금보다 나은 나'를 갈망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돌이켜 보면 지난 4년은 쉴 새 없이 일을 벌이고 번아웃을 겪고의 연속이었다. 어떨 때는 이 정도면 충분히 행복하지 싶다가 어떨 때는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떤 날은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싶다가, 어떤 날은 더 잘하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더 사랑받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났다. 내 안에 미친년이 있는 것 같았다. 나조차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숨 막힐 듯 답답할 때면 모든 의무를 벗어던지고 소파에 벌러덩 드러누워 영화와 드라마를 봤다. 육아로 몸이 매여 있는 내게는 손바닥 한뼘도 안 되는 아이폰이 곧 극장이었다. 그 극장에는 나처럼 어딘가 뒤틀린 ‘미친 여자’들이 있었다.


남편의 죽음이 슬퍼서 회사 모든 직원들과 잠을 잤다는 여자(<실버라이닝 플레이북>), 자신의 메달 장면을 돌려보며 자위하는 한물간 운동선수(<더 브론즈>), 시 때문에 5살 제자를 납치한 유치원 교사(<나의 작은 시인에게>),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회사 컴퓨터를 초기화해버린 인턴(<아워바디>), 밤마다 술 취한 척 연기하며 성범죄 가해 남성을 응징하는 여자(<프라미싱 영 우먼>), 어린 남자와 불륜에 빠져 고객 돈을 횡령한 은행원(<종이달>), 수시로 다른 여자로 빙의되는 주부(<82년생 김지영>), 두 아이 대신 자신의 욕망을 선택한 엄마(<로스트 도터>), 남자 노인들을 대신 죽여주는 성매매 여성(<죽여주는 여자>), 일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미스 슬로운>), 결혼 6시간 만에 파혼을 선택한 여자(<체실 비치에서>), 배신한 연인에게 다시 돌아가려는 여자(<아사코>)...


처음 영화를 보면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왜 저래'였다. 이 책에 나오는 27편의 영화와 5편의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결점이 있다. 실수로 혹은 고의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거나 자신을 파괴하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피가 철철 날 것을 알면서도 부딪치고 흔들리며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는 여자들의 서사를 만나면서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


세상에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여자들, 눈을 똑바로 뜨고 싸우는 여자들, 마음껏 욕망하는 여자들, 경계를 넘어 끝까지 가보는 여자들, 이전과는 다른 내가 된 여자들의 서사를 통과하며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던 견고한 벽이 조금씩 무너졌다. 영화 속 여자들이 던진 질문은 삶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으로 이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왜 이 갈증은 사라지지 않는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고민하며 나는 쓰고 또 썼다. 답을 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내기 위해 썼다.


오랫동안 남들에게 보여지는 나와 진짜 나를 구분하며 살았다. <나를 키운 여자들> 원고를 쓰는 순간만큼은 나도 32개 작품 속 여자들처럼 뼛속까지 솔직해질 수밖에 없었다. 숨기고 싶었던 지질한 밑바닥을 하나씩 건져 올리는 과정은 이상하고 모순적인 진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습관 같았던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가 옅어졌다. 동시에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됐다. 영화와 드라마 속 그녀들처럼 그리고 나처럼 조금씩 미쳐 있는 보통의 여자들을. 나 자신에게, 그녀들에게 좀 더 친절해지고 싶어졌다. 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용기와 사랑이 자랐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때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최은영 <밝은밤>


이 책에 실린 원고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던 지난 4년 동안 카카오 ‘브런치'와 <오마이뉴스>에 실었던 원고들을 다시 고쳐 쓴 것이다. 완전히 새롭게 쓴 원고도 있다. 원고를 정리하고 엮으면서 소설 <밝은밤>의 저 문장을 자주 떠올렸다. 이 책에 등장하는 여자들 그리고 나의 이야기가 부디 당신이 잠시라도 기댈 수 있는 든든한 어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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