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클럽] 장류진 단편소설 <도움의 손길>
"들어왔어요." 회사에 있는데 이모님에게 카톡이 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이모님은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집 정리를 한다. 와이셔츠 다림질을 하고 쓰레기도 버린다. 오후 1시, "끝났어요"라는 카톡이 오면 나는 "고생하셨어요"라는 메시지와 함께 바로 계좌로 돈을 입금한다.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육아휴직 끝나고 업무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퇴근 후 소파에 앉아 거실과 주방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혔다. 이십 평 남짓한 빌라는 돌 갓 지난 아이의 장난감과 육아용품으로 발 디딜 틈 없었고 싱크대에는 설거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이미 회사에서 8시간 동안 착즙되고 남은 에너지를 육아에 쓰는 것만으로 숨이 넘어가던 시기였다. 주변에서는 육아도우미를 쓰면 어떻겠냐 했지만 그때는 이상할 정도로 남의 손에 아이를 맡기고 싶지 않았다.
"육아를 외주 주는 게 싫으면 살림을 외주 줘." 지인의 조언을 듣는데 왜 이 생각을 진작 못했지 싶었다. 가사도우미 비용은 4시간에 5만 원, 주 2회 10만 원, 한 달이면 40만 원이었다. 그즈음 우리 가족은 치워야 할 것이 널려 있는 집을 떠나 남이 깨끗하게 치워놓은 호텔로 호캉스를 자주 다녔다. 우리에게 집은 머물고 싶은 곳이 아니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집에는 너무 많은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가사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면 집에 대한 애정이 좀 더 생기지 않을까. 누가 더 살림을 많이 했나 안 했나를 두고 남편과 싸우는 일도 줄어들 것 같았다.
마음에 드는 이모님 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사도우미 앱과 인력센터를 통해 몇 명의 가사도우미를 연결 받았다. 아침에 가사도우미가 출근하면 해야 할 일을 설명하고 나는 곧장 밖으로 나가 카페에서 일을 했다. 가뜩이나 좁은 집에서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감시를 하며 갑질을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싫었다.
하지만 나는 돈을 지불하고 서비스를 이용한다는 의미에서 '갑'이었다. 약속된 시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이모님이 청소를 잘하고 갔는지 구석구석 매의 눈으로 살폈다. '여기는 내가 분명히 닦아달라고 말했는데 왜 얼룩이 남아 있지? 여기는 정리가 엉망이네?' 평소 살림에 전혀 예민한 편이 아니라 생각했는데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꼭 있었다.
가사도우미는 가사만 돕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주일에 여덟 시간씩 우리 집을 맡겨야 하는데 태도가 무례하거나(살림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말을 함부로 하거나) 신뢰를 주지 못하는(약속 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하기 어려웠다.
물론 나는 식당에서 주문한 음식에 벌레가 들어 있어도 말을 못 하는 사람이기에 이모님에게 직접 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연결해 준 플랫폼을 통해 다음 예약을 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럼 플랫폼에서는 또 다른 이모님을 소개시켜줬다.
▲ <도움의 손길>은 장류진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에 수록돼있다. ⓒ 창비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받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서재에 틀어박혀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마음은 복잡했다. 나이가 지긋한, 그것도 생전 처음 보는 아주머니가 내 집에서 내 살림살이들을 땀 흘리며 청소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편치 않았다. 그러면서도 청소를 충분히 깨끗하게 잘해줄지, 내가 신경 쓴 인테리어를 실수로 더럽히거나 망가트리는 건 아닐지 하는 걱정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다. 나는 청소를 끝낸 도우미 아주머니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옷장 밑에 손을 넣어 보거나 서랍장 손잡이 위를 훑어보거나 했다. 늘 조금씩 실망스러웠고 내 기준에는 다들 못 미쳤다." -<도움의 손길> 중에서
장류진 단편소설 <도움의 손길>(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 수록작)에는 나처럼 가사도우미를 쓰기로 한 여성 화자가 나온다. 결혼 칠 년 만에 내 집을 마련한 화자의 집에는 우리 집과 달리 아이가 없다. 화자는 아이를 그랜드 피아노에 비유한다. "평생 들어본 적 없는 아주 고귀한 소리가 날 것"이고 "당연히, 그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지만 화자는 그랜드 피아노를 집에 들이지 않기로 한다. "책임감 있는 어른, 합리적인 인간이라면 그걸 놓을 충분한 공간이 주어져 있는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부족해도 어떻게든 욱여넣고 살면 살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물론 살 수는 있을 것이다. 집이 아니라 피아노 보관소 같은 느낌으로 살면 될 것이다… 중략…우리 부부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충분하다거나 여유롭다는 기분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삶이었다. 삼십대 중반, 이제서야 비로소 누리게 된 것들을 남은 인생에서도 계속 안정적으로 누리며 살고 싶었다. 이십 평대 아파트에는 그랜드 피아노를 들이지 않는다. 그것이 현명한 우리 부부가 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이십 평대 집에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고 사는 기분이라면 잘 알고 있었다. 이토록 아름답고 귀한 것을 내가 감히 가져도 될까 싶다가도, 그랜드 피아노 때문에 사라져버린 여유가 사무치게 그리운 마음을. 그랜드 피아노는 한 번 집에 들여놓으면 평생 품고 살아가야 한다. 버릴 수도, 두 동강을 낼 수도 없다. 일도 육아도 살림도 낙제점인 것 같은 날이면 내가 감당하지 못할 욕심을 낸 건 아닐까 두려웠다. 이십 평대 빌라가 아니라 삼십 평대, 사십 평대 아파트였다면 달랐을까.
그랜드 피아노를 들여놓지 않기로 한 화자는 자신이 사수한 여백을 더 쾌적하게 누리고 싶다. 취향과 정성이 묻어 있는 새 집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해 가사도우미를 부르기로 한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화자 역시 처음에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는 위치에 서는 것이 영 께름칙하다. 도우미가 오기 전날, 설거지를 그냥 두자고 말하는 남편에게 화자는 식기세척기를 사는 게 아니라 사람이 오는 거라 강조한다. 도우미를 "아줌마"라고 부르는 남편의 말을 "아주머니"라고 굳이 수정하면서.
소설 속 '도우미 아주머니'는 청소는 잘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화자를 조금씩 거슬리게 한다. 은근히 반말을 하며 집에 대한 지적을 하고 아이에 대한 질문을 하고 묻지도 않은 가정사를 말하기도 한다. 화자는 그런 도우미가 불편하고 부담스럽다. 첫날에는 서재에 있던 화자는 둘째 날부터 카페로 피신한다. 업무 범위와 방식, 고용 형태, 출근 시간 등을 놓고 화자와 도우미는 미묘한 신경전을 벌인다.
나는 마음에 드는 가사도우미를 구했고 같은 이모님과 2년 정도 함께 했다. 이모님이 왔다가는 날이면 집에 여백이 생겼다. 일주일에 두 번, 퇴근해서 현관문을 딱 열었을 때 잘 정돈된 깨끗한 집이 보이면 숨통이 트였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간 첫 주에 이모님은 사정이 생겨서 일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카톡을 보냈다. 새 집이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인 데다 이전 집보다 넓어져서 그만두기로 한 걸까. 아님 내가 뭔가 잘못했나.
살갑게 누군가를 챙기는 성격은 아니지만 나는 교양 있는 사람이므로 최대한 예의를 갖추고 이모님을 대하려 했다. 최저임금 상승을 고려해서 이모님 급여를 올려줬고 명절에는 꼬박꼬박 돈을 더 챙겨줬다. 우리가 왜, 우리 집이 뭐 어때서.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도움의 손길>을 읽으며 이모님 입장은 달랐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은 철저히 화자의 입장에서 전개된다. 나처럼 자신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화자는 의아한 시선으로 도우미를 바라본다. '내가 이렇게 배려해 줬는데, 내가 이렇게 상식적인 사람인데 저 사람은 왜 계속 선을 넘는 거지?'라는 억울함과 당혹감이 행간에서 느껴진다.
스스로 선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만큼 상대방도 자신이 정해놓은 선을 넘어오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만큼 타인도 내게 무해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화자는 자꾸만 선을 넘는 도우미가 거슬린다. 그런데 그 선은 두 사람 사이에 합의된 선이 아닌 화자의 주관적인 선이다.
<도움의 손길>을 읽는 내내 이모님에게 선을 그으려 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이모님과 2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이모님이 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회사에 있을 때 이모님이 출근했기 때문에 서로 만날 기회도 없었지만 이모님을 마주쳤을 때도 대화를 나눈 기억은 거의 없다. 사는 곳도 나이도 몰랐다. 이모님 카톡 프로필 사진에 뜨는 아이들이 이모님 딸이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사적인 대화를 하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마음 이면에는 이모님이 내게 말을 걸 기회를 미리 차단하려는 의도가 분명 있었다. 우리 집의 가장 더러운 모습을 매번 목격하고 나와 남편의 속옷을 개어주고 우리 집 현관 비밀번호까지 알고 있는 사람과 어떠한 친밀함도 없이 2년을 보냈다니.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다.
어쩌면 이모님이 우리 가족의 날것 그대로의 모습을 알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선을 그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남편은 내가 출근한 다음 아이를 등원시키고 조금 더 늦게 출근했는데 이모님이 오는 날이면 일찍 집을 나섰다. 집이 더러워서 이모님과 마주치기 민망하다는 이유였다. 사실 우리는 사람이 아닌 식기세척기를 원했던 게 아닐까. 우리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알잘딱깔센(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하게 집안일을 해줄 무해한 식기세척기를.
하지만 기계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에는 필연적으로 감정노동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완벽히 무해란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특히 가사와 돌봄처럼 매뉴얼이 명확하지 않은 서비스일수록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도 서비스를 제공받는 사람도 계속해서 감정을 쓰게 된다. 이러한 감정노동은 주로 여성이 하는 경우가 많다. 이모님을 더 자주 만나는 사람은 남편이었지만 모든 소통은 내가 했던 것처럼 말이다.
소설에서 화자와 도우미가 장류진 작가의 표현에 따르면 "번갈아가며 서로를 한 방씩 먹이는"(<2020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작가노트 중에서) 동안 화자의 남편은 이 신경전에서 쏙 빠져 있다. 그러면서 아내에게 가사도우미의 살림을 지적한다. 가사도우미에 대한 지적은 곧 가사도우미를 관리하는 아내에 대한 지적이 된다. 가부장 사회에서는 살림의 주체도 그 살림을 대행하는 사람도 모두 여성이다. 가사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두 여성의 갈등이 흥미로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이모님이 떠난 후 우리는 더는 가사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다. 그 사이 아이가 자라서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했고, 사람을 쓴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일임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을 돌보는 일은 스스로 하고 싶어졌다.
소설 후반부, 지금까지 빌런처럼 보였던 도우미는 화자에게 제대로 한 방을 먹인다. 이 대목에서 진심으로 뜨끔했다. 이모님은 지금도 계속 가사도우미 일을 하고 있을까. 우리 집과 우리 가족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이모님의 마음이 궁금하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 실린 글의 초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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