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클럽] 권여선 <봄밤>
단편소설이 낯선가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나요? 짧지만 꽉찬 단편소설을 사적으로 곱씹고 상상하는 시간, 당신을 단편소설클럽에 초대합니다.[기자말]
"그 봄밤이 시작이었고, 이 봄밤이 마지막일지 몰랐다."
- 권여선 <봄밤>
봄이 오면 꼭 읽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을 읽어야만 비로소 봄을 겪어낸 것 같다. 권여선 작가가 쓴 단편 소설 <봄밤>(권여선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 수록작).
쉰다섯 동갑내기 부부의 집은 요양원이다. 알코올 중독 환자 영경, 류머티즘 환자 수환. 두 사람은 노인과 중증 환자를 전문으로 돌보는 지방 요양원에 산다. 서로에 대한 애정이 넘치지만 언제 병세가 악화될지 모르는 부부를 요양원 사람들은 '알류 커플'이라 부른다.
12년 전 봄, 마흔셋 수환과 영경은 친구의 재혼식장에서 만났다. 둘 다 삶의 벼랑 끝에 서 있을 때였다. 스무 살부터 쇳일을 했던 수환은 사업 부도로 서른아홉에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위장 이혼을 한 아내는 재산을 정리해 잠적했다. 영경을 만나기 전까지 수환은 언제든 생을 버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버티고 있었다.
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던 영경은 이혼 후 시가에 강제로 아이를 뺏기고 삶의 의지를 잃었다.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서 교사 일을 더는 제대로 할 수 없게 된 영경은 마흔셋에 이른 퇴직을 했다. 영경은 수환을 처음 만난 봄밤을 이렇게 기억한다.
"퇴직한 지 두어달쯤 지나 친구의 재혼식에서 수환을 만났을 때 영경은 술을 마시면서 자꾸 가까이 앉은 수환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 단편소설 <봄밤>은 권여선 작가의 소설집 <안녕 주정뱅이>에 수록돼 있다.
ⓒ 창비
수환이 술에 취한 영경을 업어 데려다준 다음 날부터 두 사람은 매일 함께 술을 마신다. 동거를 시작한 것은 일주일 만이었다. 1년 반 전 수환의 류마티즘 증상이 심각해져 요양원에 입주할 때까지, 두 사람은 한 번도 떨어져 본 적 없었다. 그 두 달 동안 영경 역시 몸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수환을 따라 요양원에 들어왔다. 그렇게 부부의 집은 요양원이 되었다.
함께 살기 위해 요양원에 왔지만 영경은 수시로 외출증을 끊고 요양원 밖으로 나간다. 요양원에서는 술을 절대 마실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엔 당일로 끝났던 영경의 외출은 점점 길어져 지난번에는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영경의 보호자인 수환은 그런 아내를 말리기는커녕 영경을 기꺼이 밖에 보내준다.
"참 장한 커플이다, 우리."
"맞아. 당신 참 장해. 오래 버텼어. 다녀와라."
영경의 젖은 눈에 퍼뜩 생기가 돌았다.
"정말 괜찮겠어?"
"난 괜찮아."
영경이 더는 묻지 않고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이다."
"다행이지. 우리 빵경이, 걱정 말고 다녀와."
소설 <봄밤>은 영경을 면회하러 가는 영경의 두 언니, 영선과 영미의 대화로 시작한다. 이어서 수환과 팔순 노모와의 면회, 영경과 언니들의 면회 장면이 이어진다. 인생의 큰 실패를 겪고 병들어 늙어가는 영경과 수환의 존재는 가족들에게 골칫거리다. 영경의 두 언니는 영경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 게 참 끔찍하다"라고 말하고, 수환의 형은 노모와 함께 면회를 와서도 수환과 대화를 피한다.
수환은 영경을 처음 만난 12년 전 봄밤을 이렇게 기억한다.
"비록 화장을 하고 있었지만 영경의 눈가는 쌍안경 자국처럼 깊게 파였고 볼은 말랑한 주머니처럼 늘어져 있었다. 한 달 동안 노숙생활을 했을 때 본 여자 노숙자들을 생각나게 하는 얼굴이었다…(중략)…취한 그녀를 업었을 때 혹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앙상하고 가벼운 뼈만을 가진 부피감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핏줄로 엮인 원가족이 의무적 관계라면 영경과 수환은 자발적으로 서로를 선택했다. 두 사람은 자신처럼 만신창이인 상대방의 존재를 제 몸처럼 받아들인다. 언제 서로를 잃게 될지 모르는 고위험군 환자인 두 사람의 사랑은 위태롭고 애처롭다.
어김없이 돌아온 봄, 외출을 앞두고 영경은 수환에게 톨스토이의 책 <부활>의 한 대목을 읽어준다. 영경은 책에 나오는 분자와 분모에 대한 비유를 빌어, 분자에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분모에 그 사람의 나쁜 점을 놓으면 그 사람의 값이 나온다고 말한다. 1을 기준으로 모든 인간은 1보다 크거나 작게 된다고.
영경은 한 손으로 책을, 한 손으로 수환의 손을 잡고 "당신은 아직도 분모보다 분자가 훨씬 더 큰 사람"이라고 말해준다. 정작 수환은 자신이 점점 0에 수렴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꼭 병 때문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그는 마흔세살에 영경을 만난 후로 취한 영경을 집까지 업어오는 일 말고 영경에게 해준 것이 거의 없었다…(중략)...영경이 기꺼운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게 해주는 게 그나마 자신의 분자를 조금이라도 늘리는 일이라고, 영경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조금이라도 크게 만드는 일이라고 수환은 생각했다."
매년 봄, 알류 커플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 읽으며 대체 이 사랑을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까 고민됐다.
'다 너를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라는 말로 타인의 변화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달리 수환과 영경은 서로를 조금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 영경은 구토, 불면, 경련, 섬망 증상에 시달리면서도 요양원에서의 금주를 견딘다. 수환은 영경이 너무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외출할 수 있도록 독한 진통제를 맞고 통증을 숨긴다.
수환과 영경은 타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사랑을 한다. 1보다 큰 사람이 되기란 이미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0으로 곤두박질치는 것만큼은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류머티즘 합병증 때문에 눈물샘조차 말라버린 눈으로, 알코올 중독 때문에 허공에서 떨리는 손으로, "분모는 어쩔 수 없다 쳐도 분자라도 늘"리기 위해서.
이미 한 번의 이혼으로 사랑의 잔인한 끝을 경험한 두 사람은 그럼에도 다시 사랑을 한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 않으려는 사랑을. 여전히 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사랑에 자꾸만 조건이 붙는 나는, 두 사람의 사랑이 경이롭기만 하다. 나의 사랑은 나의 분자를 늘리고 있을까, 분모를 늘리고 있을까. 나는 1보다 큰 사람일까, 작은 사람일까.
아무리 너를 지키기 위해 나를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있다. 두 사람의 병이 그렇다. 서로를 만나기 전 몸과 마음에 켜켜이 쌓인 고통의 세월이 그렇다. 요양원 밖으로 나온 영경은 "젖을 빠는 허기진 아이처럼" 술을 쭉쭉 들이킨다.
수환의 곁을 지키지 못한 영경을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노력할 수 있는 것과 어찌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서로가 얼마나 안간힘을 다하다 무너졌는지, 영경과 수환 두 사람이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 노력이 어떻게 서로의 분자를 늘렸는지도. 두 사람의 사랑에 이름을 붙이는 일은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술에 취한 영경은 "촛불 모양의 흰 봉오리를 매단 목련나무 아래에서" 엉엉 운다. 영경은 김수영의 시 <봄밤> 속 구절을 울부짖듯 낭독한다.
"영경은 컵라면과 소주 한 병을 비우고 과자 한 봉지와 페트 소주와 생수를 사가지고 편의점을 나왔다.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영경은 큰 소리로 외치며 걸었다.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영경은 작은 모텔 입구에 멈춰 섰다.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갑자기 수환이 보고 싶었다."
봄밤에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목련나무만 봐도 울고 싶어질지 모른다. 김수영의 시를 읊고 싶어질지 모른다. 나는 올해도 그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