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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n 26. 2023

망원시장에서 춤춘 썰 풉니다

[단편소설클럽] 김금희 단편소설 <너무 한낮의 연애>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수업을 들은 적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퇴근을 하고 문학평론가가 진행하는 수업 장소로 향했다. 수업은 주로 미리 읽어온 작품에 대한 해설로 진행됐는데 하루는 평론가가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해 줬다. 


소설을 눈으로 읽지 않고 귀로 따라가는 경험은 생경했다. 손에 무엇이 쥐어질지 모른 채 선물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다음에는 어떤 단어, 어떤 문장이 귀에 들릴지 설레고 긴장됐다. 그때 평론가가 읽어준 소설이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였다. 


소설에는 '오늘은 사랑하죠'라고 무심히 말하는 여자와 종로 거리를 울면서 걷는 남자가 나온다. 여자의 이름은 양희, 남자의 이름은 필용이다. 



한낮의 종로 맥도날드에서 

       


▲ <너무 한낮의 연애>는 동명의 김금희 소설집 <너무 한낮의 연애>에 수록돼 있다. ⓒ 문학동네


같은 과 선후배 사이인 양희와 필용은 종로 어학원에서 같은 강의를 듣게 되면서 서로의 존재를 알게 된다. 강의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맥도날드에서 점심을 먹으며 매일 두세 시간 정도 대화를 한다. 아니, 대화라고 하기에는 필용의 일방적인 이야기를 양희가 듣는다. 양희에게는 질문이 없고 필용은 할 말이 많다. 두 사람은 정반대에 있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필용과 양희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필용이 앞으로 펼쳐진 인생, 그 과정에서 반드시 이겨내야 할 어려움,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고 나서야 얻게 될 성취와 인정에 대해 상상하며 지냈다면 양희에게는 그런 것이 없었다. 양희에게는 현재라는 것만 있었다. 하지만 그 현재는 지금처럼 생생하게, 운동감 있게 펼쳐지는 상태가 아니라 안개처럼 부옇게, 분명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게 풀풀 흩어지는 것에 가까웠다." 


어학원을 찾는 청춘이 대개 그렇듯 두 사람은 불확실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연극반인 양희는 필용의 말에 따르면 "정말 더럽게도 재미없는" 대본을 쓰고 있고, 필용은 백수에 가까운 유학 준비생이다. 매일 만나 시간을 보내고 양희보다 6살 많은 필용이 자신의 돈을 보태 세트 메뉴를 시켜주기도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관계의 온도가 달라진 것은 양희가 느닷없는 고백을 하면서부터다. 필용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양희가 어느 날 "선배, 나 선배 사랑하는데"라고 가만히 말한다. 필용에게 천 원, 이천 원을 쥐여주면서 "가능한 걸로요"라며 햄버거 주문을 부탁할 때와 같은 톤으로. 필용은 그럼 앞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묻지만 양희는 당황스러운 답변을 한다.

 

"모르죠,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양희의 고백으로 필용의 일상은 흔들린다. 사실 필용이 양희를 사랑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에도 필용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한낮의 맥도날드에서 집요하게 양희의 사랑을 확인한다. 오늘은 어떻냐고, 오늘도 나를 사랑하냐고. 양희는 고개를 끄덕인다. 오늘은 사랑한다고. 내일은 모르겠다고.


'내일도 모르면서 어떻게 오늘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양희의 사랑 고백 앞에서 나도 필용처럼 덩달아 황당한 마음이 됐다. 나는 양희보다 필용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내일과 모레가 예상이 돼야 오늘을 살 수 있었다. 내일과 모레를 예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정확한 목표와 계획을 세워야 했으며 오늘 잘하고 있다는 감각이 필요했다. 오늘은 내일과 모레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였다.


양희의 내일과 모레를 알 수 없는 필용은 초조한 마음으로 양희의 오늘을 자꾸 확인한다. 필용은 '오늘도 사랑한다'는 양희의 말을 들으며 "불가해한 기쁨"을 느낀다. 이때 필용의 마음은 누군가 나를 사랑하는 상태를 사랑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대학생도 유학생도 직장인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에서 필용에게는 자기 효능감을 확인할 방법이 양희의 사랑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용은 정작 양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는 정확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괴상한 애정전선"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이번에도 양희의 발언 때문이다. 양희는 역시나 표정 없는 얼굴과 목소리로 필용에게 말한다.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이라고. 사랑이 없어졌다고. 필용은 양희에게 막말을 퍼붓고 양희는 맥도날드를 떠난다. 


십육 년 후, 필용은 돈과 관련된 문제 때문에 직장에서 영업팀장에서 시설관리팀 직원으로 좌천 통보를 받는다. 양희가 인생에 없었던 십육 년 동안 필용은 내일과 모레를 생각하며 오늘을 착실히 살아왔을 것이다. 인생 최대 위기를 맞고 더 이상 미래를 예상할 수 없어졌을 때 필용이 양희를 떠올린 것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울면서 종로 맥도날드까지 걸어간 필용은 양희가 대학 시절 썼던 극본과 동일한 제목의 연극이 근처에서 공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관객이라고는 세 명밖에 없는 작은 극장에서 눈만 빼고 검은 쫄쫄이 전신 타이츠를 입고 있는 배우를 본다. 필용은 양희와의 재회를 망설이면서도 점심시간마다 극장을 찾는다.  



목적 없는 춤 


필용의 관점에서 전개되는 소설에서 양희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십육 년 전, 양희가 이제 더는 필용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후 필용은 무작정 양희의 본가인 문산으로 양희를 찾아간다. 그리고 양희가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알게 된다. 필용은 자신이 양희의 허무와 무기력을 잘못 독해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 


내일과 모레를 알아야만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내일과 모레를 생각하지 않아야 오늘을 살아낼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양희는 후자인 사람이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양희의 '오늘만 생각함'이 결코 체념이나 회피가 아니라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갈 때 나는 매주 한 번 춤을 췄다. 왜 갑자기 춤이냐고 한다면 머리 대신 몸을 쓰고 싶었다. 머리를 쓰면 자꾸만 미래를 생각하게 됐고 오늘이 불안해졌다. 머리 없이 몸만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간절하게. 


매주 화요일마다 한강공원 잔디밭에서 비가 올 때는 지하에 있는 춤 연습실에서 이름과 별명만 아는 사람들과 자넷 잭슨의 노래에 맞춰 플래시몹 춤 연습을 했다. 머리 대신 몸을 쓰기로 했지만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몇 번이고 기획자에게 물었다. 플래시몹을 어디서 어떻게 할 거냐고. 기획자는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그건 그때 가서 고민하면 된다고. 


플래시몹을 하기로 한 날, 망원역에 열 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우리는 망원시장과 한강공원 굴다리와 한강공원 잔디밭을 지나 서울함까지 걸으면서 춤을 췄다. 정해진 장소는 없었다. 여기서 추면 재밌겠다고 생각되는 곳에 멈춰서 음악을 틀고 춤을 췄다. 초록불이 들어왔을 때를 기다렸다가 횡단보도에서 춤을 추기도 했다. 


망원시장을 지나 한강공원 잔디밭에서도 춤을 췄다@홍밀밀


춤을 추기 시작할 때마다 내 안에서는 '괜찮을까'라는 걱정이 부록처럼 따라왔다. '차가 올 수도 있는데 위험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지나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너무 부끄러울 것 같은데 괜찮을까.' 앞으로 발생할 수도 있는 위험 요소를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었다. 


막상 춤을 추기 시작하자 문제가 될 것은 하나도 없었다. 차가 지나가면 비켜주고 사람이 길을 터주면 됐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우리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다. 춤이 반복될수록 나는 춤을 추는 지금 이 순간에만 집중하게 됐다. 동작이 틀려도 박자를 놓쳐도 괜찮았다. 30도 넘는 더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뻣뻣한 팔과 다리를 쭉쭉 뻗었다. 머리는 사라지고 몸만 남았다. 살면서 처음 느껴보는 해방감이었다. 


삶은 우리가 예측하고 통제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내일을 생각하던 필용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오늘만 생각하던 양희는 꿈을 이룬 사람이 된다. 내일과 모레를 걱정하며 익숙한 불안이 밀려올 때 나는 양희를, 목적 없는 춤을 추던 초여름을 생각한다. 오늘은 그저 오늘에 충실하기로 한다. 내일은 모르고, 알 필요도 없으니. 오늘은 오늘을 살기로.




단편소설이 낯선가요? 어떻게 읽어야 할지 잘 모르겠나요? 짧지만 꽉찬 단편소설을 사적으로 곱씹고 상상하는 시간, 당신을 단편소설클럽에 초대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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