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자들] <사이렌 : 불의 섬> 몸만 믿는 여자들의 탄생
아이는 돌이 되기도 전부터 소방차와 경찰차를 좋아했다. 소방차와 경찰차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에도 그림책에도 소방관과 경찰관은 남성이었다. 아이에게 소방관, 경찰관은 남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일부러 여성 소방관과 경찰관이 등장하는 그림책을 고르고, 드라마 <라이브>에 나오는 여성 경찰관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가 실제로 접하는 매체에는 소방관 아저씨와 경찰관 아저씨만 가득했다.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 불의 섬>에서 소방관 정민선이 독기 가득한 얼굴로 호스를 머리 위로 들어 정교하게 불을 끄는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좀 더 어렸을 때 이런 프로그램이 나왔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군인 강은미가 도끼로 장작을 패고 운동선수 김성연이 곡괭이로 땅을 파는 모습을 보면서 '멋지다'는 감탄과 함께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왔다. 내가 어렸을 때 이런 프로그램을 보고 자랐다면 내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이렌>은 남자의 직업으로 인식되는 소방관, 경찰관, 군인, 운동선수, 경호원, 스턴트 6개 직업군의 여성 24명이 직업 별로 팀을 이뤄 무인도에서 6박7일 동안 펼치는 서바이벌 예능이다. 1화에서 발이 푹푹 빠지는 갯벌을 악으로 깡으로 네 발로 거침없이 기어가는 여자들을 보면서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와, 이 여자들 뭐지.'
▲ 넷플릭스 예능 <사이렌: 불의 섬> 한 장면. ⓒ 넷플릭스
<사이렌>의 여자들은 여러모로 Mnet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여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강한 승부욕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실력에 추호의 의심도 없으며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욕하고 소리 지르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연합도 하고 배신도 한다.
고백하자면, 평생을 조신하고 단정하게 살아온 본투비 유교걸로서 처음에는 거부감이 느껴졌다. 여자들의 사회에서는 자신감과 승부욕을 드러내는 것이 금기시된다. 남자가 악으로 깡으로 뭔가를 하면 열정과 패기가 있다는 말을 듣지만 오기와 깡다구를 숨기지 않는 여자들은 '무섭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무서운 여자, 기센 여자, 독한 여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자주 웃었고 쿠션어(무언가 부탁하거나 부정적 말을 할 때 좀 더 부드럽게 전달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기자주)를 썼으며 '에이, 아니에요'라는 겸손의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승리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누가 우리를 이기겠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이렌> 여자들의 모습은 분명 낯설었다.
또 하나 낯설었던 것은 <사이렌>에서 여성의 몸을 재현하는 방식이다. 얼마 전, 아이돌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와 함께 걸그룹 뮤직비디오를 보는데 아이가 물었다.
"엄마, 근데 아이돌은 왜 다 말랐어?"
아이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다. 요즘 여자 아이돌의 필수 덕목 중 하나는 복근이다. 체지방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마른 몸에 11자 복근을 갖고 있어야 비로소 예쁜 몸이 된다. 살도 빼야 하는데 근육까지 만들어야 하다니. 요즘 아이돌 되기 참 어렵다.
▲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한 장면. ⓒ 넷플릭스
<사이렌> 속 여자들의 몸은 사회가 정의 내리는 '예쁜 몸'은 거리가 멀다. 다부지고 근육이 있고 문신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의 근육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직업을 수행하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근육이다. 천편일률적인 미디어 속 여자들의 몸과 달리 <사이렌> 속 여자들의 몸은 모두 다르다. 현실의 여자들이 그런 것처럼.
근육 있는 여자들은 허리 부상을 당한 동료가 쉴 수 있도록 혼자 도끼로 수십 개의 장작을 패고, 패널티 때문에 모래가 아무리 다시 쌓여도 곡괭이와 삽으로 땅을 파고,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 속에서도 악착같이 깃발을 사수하고 비가 쏟아지는 숲길을 전속력으로 달린다. 나무를 잘라 불을 피우는 것도 다른 팀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기지를 정비하고 못질을 하는 것도 여자들은 당연하게 해낸다. 여자들의 몸에는 직업적 경험과 자부심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 몸으로 못할 것이 없다는 자신감이 묻어난다.
방송을 보며 깜짝 놀란 장면이 있었다. 여성 출연자들이 티셔츠를 벗고 스포츠 브라탑만 입고 있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오는데 그 모습이 전혀 관음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더우니까, 작업할 때 불편하니까 옷을 벗을 뿐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백한 편집은 <사이렌>이 갖고 있는 최대 미덕이다.
<스트릿 우먼 파이터>와 달리 <사이렌>에서는 출연자들의 서사에 파고들기보다는 승부 그 자체에 몰두한다. 출연자들의 나이도 알 수 없고 그 흔한 개인사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작전을 짜고 팀워크를 다지는 모습에 집중한다. 연합도 배신도 기싸움이 아닌 전략으로 다뤄진다. 지금까지 이렇게 정직한 서바이벌 예능이 있었던가.
▲ 넷플릭스 <사이렌: 불의 섬> 한 장면. ⓒ 넷플릭스
정공법은 통했다. <사이렌>에는 우승 상금이 없다. 각 팀은 자신의 직업적 명예를 걸고 싸운다. 한 회 한 회 지날수록 처음에는 빌런이라고 생각했던 팀의 승부를 향한 진심과 열정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무엇보다 이들이 여자라는 사실은 하나도 중요해지지 않는다.
스포츠 만화를 좋아하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작품이 많지 않고 풀어내는 방식도 제한적이라는 데 아쉬움을 느꼈다는 이은경 PD는 제작 발표회에서 "출연자들을 인터뷰하면서 진행해 보니 그분들은 자신을 '여성 소방관'이 아닌 '소방관'이라고 하더라"라면서 "'여자 치고 잘한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직업을 수행하는 데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사이렌> 속 여자들은 몸을 통해 보여준다.
"몸 하나만 믿고 가는" 여자들을 보면서 나는 내 몸을 믿은 적 있는지 돌이켜 봤다. 학교에 다닐 때는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던 몸은 직장에 들어가 컴퓨터 앞에 앉아 일만 하는 몸이 됐다. 30대가 되면서 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고,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몸을 잘 돌봐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됐지만 여전히 내 몸을 믿기 어렵다. 몸을 믿고 뭔가를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마흔이 된 올해 내 목표는 달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나는 내가 달릴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달리기를 시작해 보니 달릴 때마다 조금씩 더 많이, 지치지 않고 달릴 수 있는 나를 발견한다. 이 재밌는 것을 왜 이제야 시작했을까, 왜 그동안 내 스스로 내 몸의 가능성을 제한했을까 아쉬웠다.
<사이렌>을 보면서 나도 근육 있는 여자가 되고 싶어졌다. 오기와 깡다구를 갖고 내 몸 하나만 믿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여자가 되고 싶어졌다. 더 많은 소녀들이 이 시리즈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에서 '나를 키운 여자들'에 이어 '문제적 여자들'이라는 새로운 프리미엄 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영화에서 확장해 대중문화 속 여자들에 주목하려 해요. 격주에 한 번 씁니다.
TV·OTT, 유튜브 등 영상 매체 속 심상치 않은 여자들을 사심 가득 담아 탐구합니다.
'번아웃 북클럽' 모집 중. 7월 10일부터 시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