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자들]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 호스트 이영지의 진정성
"너는 당연히 소폭이지?"
오랜만에 만난 전 직장 선배의 물음에 당황했다.
"아, 제가 소폭을… 마셨던가요?"
회식 때마다 소맥을 말아마시고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잠들었던 20대가 전생 같았다.
술자리가 즐거웠다. 과거형이다. 알딸딸하고 느슨한 마음으로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고 맨 정신이라면 꺼내지 못했을(않았을)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 좋았다. 이제는 술이 예전처럼 맛있지 않다. 숙취가 며칠씩 가는 것도 괴롭고(세월이여...) 술기운에 다음 날이면 이불킥할 흑역사를 쌓는 것도 싫다. 술 마시는 즐거움보다 내일에 대한 걱정이 더 크다.
그럼에도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술을 마시던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 유튜브에서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아래 <차쥐뿔>)을 본다. <차쥐뿔>은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누는 음주 예능이다. 방송 소개에는 '쌩쥐뿔도 없는 이영지의 1:1 취중진담 쇼'라고 적혀 있다. 2022년 6월 첫 방송을 시작해 현재 시즌2까지 이어지고 있다.
호스트인 이영지는 '1등 망나니'를 자처하며 주종에 상관없이 병나발을 불며 술을 들이 마신다. 촬영은 이영지의 실제 자취방에서 진행되는데 친한 친구들과 자취방에서 술판을 벌이는 것처럼 술 마시며 이야기 나누고 술 게임을 한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한다.
콘셉트만으로는 딱히 독특할 것 없어 보이는 이 취중진담 쇼는 구독자 수가 300만 명이 넘었고 1000만 회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한 영상도 다수 만들어냈다. 출연진도 화려하다. 시즌1 마지막 회에는 BTS의 진이, 시즌2 첫 회에는 블랙핑크의 지수가 나왔다.
▲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 시즌2를 시작하면서 이영지는 그동안 유사한 음주 예능이 많이 나왔다면서 자신은 '1등 망나니'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 차린건 쥐뿔도 없지만
<차쥐뿔>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호스트 이영지의 역량이다. tvN <인생술집> 등 술을 마시면서 하는 예능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남성 호스트가 아니라 2002년에 태어난 20대 초반의 여성 단독 호스트가 음주 예능을 이끄는 경우는 없었다.
이영지는 정말로 친구를 초대하는 것처럼 잠옷을 입고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로 방송에 나와 어떠한 꾸밈도 가식도 없이 솔직한 모습을 보여준다. '대문자 E(외향형)'답게 괄괄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고 엉덩이 흔드는 트월킹 댄스를 추며 혼을 쏙 빼놓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디에서도 듣지 못했던 진솔한 답변을 이끌어낸다. 술자리의 농담과 진담 사이에서 이영지는 영리하게 줄타기를 한다.
<차쥐뿔> 댓글에는 '리스너(listener)'로서의 이영지의 태도에 대해 감탄하는 반응이 많다. 이영지는 스스로가 먼저 주접을 떨며 망가지고 솔직한 이야기를 꺼냄으로써 게스트가 편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판을 깐다. <차쥐뿔>에 나온 게스트들이 공통적으로 '또래 친구랑 술 마시고 노는 것 같다', '카메라가 있다는 것을 잊게 된다'라고 말하는 데는 이영지의 공이 크다.
<차쥐뿔>은 아이돌 입덕 영상으로 불린다. 시즌1부터 방영된 22개의 에피소드 중에서 박재범, 크러쉬, 장기하, 비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에피소드에 아이돌이 출연했다. 걸그룹 트와이스는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음주 방송을 했다. 팬분들에게 술 마시는 모습을 처음으로 보인다면서 긴장하던 나연은 방송용 의상을 입고 나왔다가 영지가 빌려준 편한 잠옷으로 갈아입고 즐겁게 술 게임을 한다.
세븐틴 호시는 주량이 1병 반이라고 했지만 15분 만에 취해서 혀가 꼬이고 다리가 풀린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소속사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하며 눈물을 흘린다. 완벽하게 준비된 모습만 화면에 잡히던 아이돌의 취기 어린 민낯은 오히려 인간미 있다는 반응을 얻었다. 아이돌 팬들은 앞다퉈서 자신의 최애를 <차쥐뿔>에 초대해 달라고 요청한다. 팬들만 알고 있거나 팬들조차 알지 못했던 아이돌의 매력을 이영지가 이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호스트로서 이영지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그의 ‘팬심’이다. ⓒ 차린건쥐뿔도없지만
유튜브 채널 <문명특급>의 재재가 '이런 것까지 어떻게 알지?'라는 치밀한 준비성으로 게스트에게 감동을 줬다면, 호스트로서 이영지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장점은 그의 '팬심'이다.
Mnet <고등래퍼3>와 <쇼미더머니11>에서 둘 다 여성 최초로 우승한 래퍼이지만 이영지의 스펙트럼은 힙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게 이영지라는 이름을 각인시킨 것은 지난해 1월 그가 올렸던 <으르렁> 커버 영상이었다.
춤을 좋아하는 이영지는 <스트리트 걸즈 파이터>에 나오는 고등학생 여자 댄서들을 섭외해 <으르렁> 2022 걸스 버전을 업로드했다. 평소에는 그저 목소리 크고 예능감 있는 MZ세대 정도로 생각했는데 웃음기 쫙 빼고 진지한 모습으로 엑소의 춤을 재해석해서 <으르렁> 춤을 추는데 정말 멋져서 몇 번이나 돌려봤다. 대중문화를 사랑하는 기획자로서의 이영지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는 콘텐츠였다.
하루의 절반을 인터넷과 함께 하는 '도파민 중독자' 이영지는 웬만한 K-POP 댄스는 다 출 줄 알고 다른 아이돌의 버블(아이돌과 메시지로 소통할 수 있는 유료 구독 서비스)을 구독한다고 해서 아이돌 팬덤 사이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뮤지션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이영지는 취중진담을 한다. 세븐틴 호시에게는 유년 시절부터 세븐틴의 음악을 들으면서 힘을 얻었다고 말하면서 본인을 채찍질하는 타입인데 버겁지 않냐고 넌지시 묻고, 다른 멤버들보다 자신의 역량이 부족한 것 같았다고 말하는 투모로우바이투게더(투바투) 수빈에게는 "(수빈의) 직캠을 많이 봤는데 진짜 잘한다"면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블랙핑크 지수에게는 다른 멤버들이 먼저 솔로로 나왔을 때 부담이 크지 않았는지 묻고, 트와이스 나연에게는 연예계 선배로서 악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조언을 구한다.
대중문화의 팬이자 자신도 음악을 하는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이영지가 건네는 말에 게스트들은 위로를 받고 힘을 얻는다. 투바투 수빈은 "방송이면 어느 정도 경계를 하면서 하는데 내 얘기를 하는데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영지는 팬들이 뮤지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어쩌면 뮤지션인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게스트들에게 들려준다. 당신들은 지금 그 자체로도 충분히 멋지고 앞으로도 계속 음악을 하며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tvN <뿅뿅 지구 오락실>에 함께 출연하는 아이브 안유진이 나왔을 때 이영지는 "나는 네가 30살 돼서도 50살 돼서도 아이돌 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안유진이 "누가 봐줄까?"라고 말하자 이영지는 곧바로 대답한다. "나!"
그런 의미에서 에스파 카리나 편을 둘러싼 '얼평(얼굴 평가)' 논란은 안타까운 면이 있다. 방송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면 이영지의 카리나의 외모에 대한 언급은 평가라기보다는 추앙에 가깝다. 아이돌에 대한 팬심은 외모에 대한 선호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영지는 팬들이 그런 것처럼 카리나의 얼굴이 좋고, 카리나의 모든 게 매력적이라고 진심을 다해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이영지가 자신의 외모를 비하하면서 카리나의 외모를 지나치게 부각시킨다고 불편하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팬심 충만한 방송의 양날이다.
▲ 이영지는 팬들이 뮤지션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어쩌면 뮤지션인 자신이 듣고 싶었던 말을 게스트들에게 들려준다. ⓒ 차린건쥐뿔도없지만
<차쥐뿔>에서 이영지의 말이 더욱 진정성을 얻는 것은 그 또한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매번 고민하고 번뇌하는 청춘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쇼미더머니11>에 출연 당시 이영지는 '다른 래퍼들의 기회를 빼앗는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인지도가 높은 만큼 매 경연마다 과한 관심과 혹독한 평가를 받아야 했고, 결국 우승을 했지만 이번에는 '인기 투표'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쇼미더머니>에서 발표한 곡인 'HUG'에서 이영지는 "이걸 듣는 너는 날 안 싫어해도 돼, 어차피 내가 날 제일 싫어하니까"라고 말한다.
내가 솔직한 가사를 쓰고 싶었던 건 솔직하지 못한 내가 너무 싫어서. 또 내 목소리도 싫어서. 누가 지적할 때면 외면하고 싶어서 괜히 핏대를 세워. 연습해 볼게. 살아가는 법을. 딱 한 번만 나를 꽉 안아준다면. 너의 위로는 나의 두 번째 어깨가 돼. - 이영지 'HUG' 중에서
뮤지션과 예능인 사이, 래퍼와 아이돌 사이. 다재다능하지만 그만큼 역설적으로 애매한 위치에 있는 이영지는 자신을 채찍질하고 미워하면서도 따뜻한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
이영지가 자기 혐오와 연민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이영지 최고의 무대라고 생각하는 <쇼미더머니> 세미 파이널 곡 'Witch'에서 이영지는 '마녀'라는 콘셉트를 끌어와서 '아무리 불을 질러봐라, 나는 그 불길 속에서 춤을 춘다'라는 내용을 담는다.
너나 잘 해 네 단도리. 날 찌르면 빨간 액체 대신 흘러 철면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불 붙여봐. But I'm non-flammable. 불길 위에서 dance. I'm a WITCH. - 이영지 'WITCH' 중에서
유재석이 보낸 문자에 일주일 만에 답장을 보내고, 나영석에게 '영석이 형'이라면서 거침없이 장난을 치고, 래퍼라는데 K-POP 댄스를 추고, 자존감 낮은 모습을 보이다가도 "욕심 많은 난년"(<차쥐뿔> 안유진 편)으로서의 야망을 드러내고. MZ를 하나의 카테고리로 납작하게 묶을 수 없듯 종잡을 수 없고 규정할 수 없음은 이영지만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이영지는 이제 고작 스물 둘이다(새로 바뀐 만 나이에 따르면 스무 살). 앞으로 보여줄 것이 무궁무진하다.
<차쥐뿔>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팬심과 '망나니 정신'만으로 방송을 이어가기에는 고려해야 할 것이 많아질 것이다. 하지만 이영지는 이영지답게, 영리하고 당돌하게 돌파해 나갈 것이다. 이영지에 대한 팬심에서 나온 말이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
TV·OTT, 유튜브 등 영상 매체 속 심상치 않은 여자들을 사심 가득 담아 탐구합니다.
7월 10일부터 시작하는 '번아웃 북클럽' 모집 중이에요. 개인적 차원의 번아웃을 넘어 건강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사회를 함께 고민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