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자들] tvN <댄스가수 유랑단>의 '추억 팔이'를 응원하며
'또 추억 팔이야?'
tvN <댄스가수 유랑단>에 대한 첫 느낌은 피로감이었다. 왕년에 인기 있던 가수들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도, MBC <놀면 뭐하니?>에서 '싹쓰리'(2020년) '환불 원정대'(2020년)로 이미 비슷한 방송을 했던 이효리와 김태호 PD의 조합도 전혀 신선할 것 없었다. 김태호 PD는 MBC 퇴사 이후 <서울 체크인>(2022), <캐나다 체크인>(2022)으로 이효리와 또다시 호흡을 맞췄다. '또 이효리-김태호야?'라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1화부터 방송을 보면서 '그만 볼까'라는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다. 김태호 PD의 예능은 설명문 같다. 캐릭터들의 관계를 디테일하게 설명하면서 시청자들이 이입할 수 있는 지점을 짚어준다. 서사를 차곡차곡 쌓아서 감동을 주는 방식이 친절하기는 하지만 속도감 있고 위트 있게 탁탁 치고 나가는 요즘 예능과 비교했을 때는 올드하고 무겁게 느껴진다.
서사를 만들고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는 시간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숏폼 콘텐츠에 익숙해진 집중력은 수시로 정지 버튼을 누르게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현재도 충분히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이들에게 왜 반복적으로 판을 깔아줘야 하는지 반감이 생겼다.
굳게 끼고 있던 팔짱을 풀기 시작한 것은 3화부터였다. 보아와 엄정화가 무대도 조명도 없는 체육관에 가서 태권도복 입은 어린이들 앞에서 춤추며 노래하고, 이효리는 소방서 주차장 길바닥에서 '텐미닛'을 부른다. 화사와 김완선은 여수 밤바다 앞에서 시민들 사이에 둘러싸여 깜짝 버스킹을 한다.
▲ tvN <댄스가수 유랑단> 한 장면. ⓒ tvN
수없이 1위를 해봤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던 여성 솔로 가수들은 중앙의 크고 화려한 무대가 아니라 지역으로, 대중 속으로 가까이 스며든다. 코로나19 앤데믹 이후이기에 이러한 장면은 더욱 극적으로 느껴진다. 시민들의 반응도 더 뜨겁다. 보아는 신인 때도 이런 공연은 해보지 못했다면서 예상하지 못한 관객을 만나는 것이 재밌다고 말한다.
'유랑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댄스가수 유랑단>은 관광버스를 타고 진해, 여수, 광양, 광주 등 전국 각지를 돌면서 공연을 한다. 공연장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유랑단 멤버들의 노래가 생소한 젊은 세대를 만나기도 한다. 어린이들은 데뷔 24년 차 보아를 보고 '뉴진스', '아이브'가 아니냐고 묻는다.
여고 댄스팀을 만나 깜짝 공연을 할 때 데뷔 26년 차 이효리는 그 어느 때보다 긴장한 모습을 보이고, 데뷔 38년 차인 김완선은 이 방송을 통해 처음으로 대학 축제에서 공연을 한다. 다 합하면 경력 129년 차 베테랑 가수들이지만 공연할 때마다 이들은 긴장감이 역력한 모습을 보인다. 데뷔 31년 차 엄정화에게는 '엄살정화'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꾸준히 음반을 내면서 활동하고 있는 보아와 화사를 제외하고는 이효리, 엄정화, 김완선 모두 무대에 서는 경험 자체가 오랜만이다. 50대인 엄정화와 김완선은 새로운 댄스팀을 꾸려서 호흡을 맞추고 40대인 이효리는 안무팀 '나나스쿨'과 20년 만에 재회한다. 방송에는 여성 가수들이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편곡부터 안무, 의상 등을 치열하게 고민하는 무대 비하인드가 정성스레 담긴다.
수많은 공연을 했지만 이들이 부담감을 갖는 이유는 그만큼 잘해내고 싶기 때문이다. 여수에서의 공연을 마치고 처음 합숙하는 날, 엄정화가 출연한 JTBC 드라마 <닥터 차정숙>이 첫 방송을 했다. 차마 본방송을 보지 못하던 엄정화는 멤버들이 모두 잠들자 홀로 방송을 보고, 김완선이 엄정화 곁에 함께 있어준다.
엄정화는 '연차가 쌓일수록 더 부담이 커지는 것 같다'면서 '(연기하는 것이) 너무 좋으니까 더 하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김완선은 엄정화에게 힘주어 말한다.
"그럼, 더 할 수 있지.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나이 들어서 70, 80까지 배우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고."
다음 날 <닥터 차정숙>에 대한 뜨거운 반응을 확인한 엄정화는 침대에 누워 한참 동안 숨죽여 운다. 오랫동안 연예계 활동을 했지만 이 일이 너무 좋기 때문에 더 욕심을 내고 더 긴장하고 반응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는 마음. <댄스가수 유랑단>에 나오는 가수들은 그 마음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무대에 오르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무대에서 가장 편한 마음이 되는 사람들.
2010년대에 데뷔한 화사부터 1980년대에 데뷔한 김완선까지. 연차와 경력의 차이와 무관하게 유랑단 멤버들은 서로를 한 명의 아티스트로서 존중한다. '솔로 가수의 외로움이 있다'는 이효리의 말처럼 솔로 가수는 모든 것을 혼자 책임져야 한다. 무대에 오르는 것은 혼자이지만 멤버들이 한 명씩 무대에 오를 때마다 다른 멤버들은 진심으로 응원을 보내준다. 대기실에서 무대를 모니터링하면서 춤추고 노래하며 신나게 즐기다 어떤 점이 좋았는지 구체적으로 피드백 해준다. 잘 했다고, 멋졌다고 아낌없이 칭찬을 보낸다.
여성 선후배의 시너지는 이 방송의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데뷔 10년 차 화사는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그램에 출연하기로 했다가 첫 공연에서 선배 가수들의 무대를 보면서 너무 떨리고 부담이 됐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된다고. 그러자 이효리는 이번 유랑단 활동이 화사에게 정말 좋은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댄스가수 유랑단>에는 여자 가수들의 '기싸움' 같은 건 없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여자들은 다른 여자들을 돕는다. 최근에 무대에 선 경험이 많은 화사는 선배 가수들에게 무대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팁에 대해 알려준다.
동료의 존재는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보아는 데뷔 이후 처음으로 SMP(SM 퍼포먼스)에서 벗어나 엄정화의 '초대'에 맞춰 섹시한 콘셉트로 무대를 꾸미고, 엄정화는 보아에게 의상은 물론이고 무대에 대해 애정 어린 조언을 해준다. 보아는 30대 여가수로 살아가는 것의 고민을 나눈다.
외모나 이미지로 납작하게 평가받기 쉬운 여성 가수들의 프로페셔널한 면모를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 프로그램이 갖는 의미는 충분하다. 그런 측면에서 퍼포먼스 중 극히 일부 동작이 자극적으로 편집돼 재생산되고 화사를 '공연음란죄'로 고발하는 단체까지 나타났다는 것은 심히 유감스럽다. 여자 가수들은 너무나 쉽게 입방아에 오르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된다.
▲ tvN <댄스가수 유랑단> 한 장면. ⓒ tvN
여성 가수들의 연대라는 새로운 판을 끌어가는 것은 '유랑 단장'인 이효리의 힘이다. 두 언니와 두 동생 사이에서 이효리는 허리 역할을 하고 특유의 센스와 통찰력으로 프로그램의 중심을 잡는다.
그룹으로서가 아니라 오롯이 혼자 무대에 서는 것은 이효리에게도 큰 도전이었을 것이다. 가수로서 이효리는 영광의 순간만큼이나 논란의 순간도 크게 겪었다. 이효리와 이상순이 함께 꾸민 '멍청이' 무대에 극명하게 갈리는 혹평과 호평에서 볼 수 있듯이, 이효리기에 대중은 더 열광하지만 이효리기에 더욱 가혹하기도 하다.
'과거 우려먹기 예능만 몇 년째 하고 있는 이효리가 안타깝고 안쓰럽다'라고 했던 어느 평론가의 충고처럼, 지금 이효리에게 시급한 것은 '추억 팔이'가 아니라 새로운 노래, 새로운 음반을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년 전 불렀던 노래를 똑같은 가수가 부르더라도 이효리는 그때의 이효리가 아니다. '핑클' 시절부터 이효리의 무대를 지켜본 나는 이효리가 어느 때보다 여유를 갖고 즐기면서 무대를 한다고 느꼈다.
▲ tvN <댄스가수 유랑단> 한 장면. ⓒ tvN
무대 아래에 있는 시간을 보냈던 이효리는 단순히 과거의 영광을 뻔하게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최신 트렌드를 익히고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려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커리어를 업데이트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며, 이효리라는 이름의 무게감은 이효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가수 이효리의 다음이 기대되는 이유다.
탈퇴했던 인스타그램을 다시 개설한 이유에 대해 이효리는 "숨고 싶은 10년의 시기가 있었다면 소통하고 싶은 10년의 시기가 온 것 같다"라고 말한다. 무대에 다시 오르기로 결심한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이효리는 "지금 나의 경쟁 상대는 젊을 때의 이효리"라고 말한다.
걸그룹 전성시대라고 하지만 30대 이후 여성 가수들의 롤모델은 여전히 부족하다. 여자들은 언니들의 등을 보면서 자란다. 40대 이효리가 앞으로 개척할 길을 응원한다.
TV·OTT, 유튜브 등 영상 매체 속 심상치 않은 여자들을 사심 가득 담아 탐구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