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여자들] 더 많은 '배두나'가 필요하다
'문제적 여자들' 연재 마감을 앞두고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아이템을 준비했다가 접었다. 젊은 교사의 죽음이 자꾸만 마음을 짓눌렀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SNS에서 'S초 교사'의 죽음 때문에 마음이 무겁다면 영화 <다음 소희>를 꼭 보라는 포스팅을 봤다. 지난 2월 개봉한 영화 <다음 소희>는 'S초 사건' 이틀 후인 7월 20일 넷플릭스에 공개됐다.
<다음 소희>의 소희(김시은)는 전주의 한 특성화고등학교 애완동물 관리학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다. 춤을 좋아하는 활발한 성격인 소희는 졸업을 앞두고 현장실습을 나가게 된다. 담임 교사는 소희가 일하게 될 곳이 대기업이나 다름없다고 치켜세우지만 실상은 대기업의 하청업체인 콜센터다.
'사무직 여직원'이 될 거라며 하얀색 투피스 차림으로 출근했던 소희는 앞으로 자신이 하게 될 일을 마주하고 잠시 얼굴이 어두워진다. 하지만 이내 밝은 표정으로 "파이팅"을 외친다. 아직은 이 일이 어떤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 특성화고등학교에 다니는 소희(김시은)는 졸업을 앞두고 콜센터에 현장실습을 나간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소희는 수많은 진상 고객을 상대하며 매일 야근을 한다. 회사는 상담사의 인권을 보호해 주지 않고 상담사들끼리 과도한 경쟁을 붙이며 실적을 압박한다. 더 큰 문제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현장실습생은 실습생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월급은 터무니없이 적고, 약속된 인센티브조차 제대로 지급되지 않는다.
영화에는 두 번의 죽음이 나온다. 첫 번째는 콜센터 직원들을 관리하던 하청업체 팀장의 죽음 그리고 소희의 죽음. 회사 주차장에서 팀장이 숨진 채 발견되지만 팀원들은 슬픔과 충격을 다스릴 새도 없이 곧바로 업무를 재개한다.
새로운 팀장은 직원들에게 말한다. 일단은 마음을 추스르고 우선 일을 하자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 한다고, 다른 팀에 피해를 주면 안 된다고. 본사에서는 팀장과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고 직원들의 입막음을 한다. 팀장의 죽음은 산재가 아닌 단순 자살이 된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소희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회사에서는 소희의 죽음이 업무와 무관하며 소희가 원래부터 문제가 있던 아이였다고 주장한다. 이상한 아이 때문에 피해를 보고 있는 것은 오히려 회사라고. 회사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면 그냥 그만두면 되는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인다.
영화를 보면서 지독한 기시감을 느꼈다. 초등학교 교사가 교실에서 숨진 채 발견됐지만 학교는 여느 때처럼 운영됐고, 일부 언론에서는 숨진 교사의 일기장을 근거로 고인의 사적인 관계와 병원 기록을 공개하며 고인의 죽음을 개인사로 몰아갔다. 이는 명백한 사생활 침해이자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보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20대 교사의 죽음 이후, 애도의 자리에는 증오가 남았다. 처음에는 돈과 권력이 있는 특정 학부모의 갑질이 문제라고 하더니 지금은 '진상 부모 체크리스트'라는 게시물이 유행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이를 본 학부모들은 '진상 교사도 있는 것 아니냐'라며 반발한다. 누군가는 학생인권조례가 문제라 하고, 누군가는 버릇없고 폭력적인 '금쪽이'가 문제라 하고, 누군가는 오은영 박사의 훈육법이 문제라고 한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만 있다.
▲ 유진(배두나)의 수사를 통해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이 점차 드러난다. ⓒ 트윈플러스파트너스㈜
영화 <다음 소희>의 전반부는 소희의 이야기가, 후반부는 소희의 죽음을 추적하는 형사 유진(배두나)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기계적으로 사건을 수사하던 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둘러싼 거대한 불합리를 목도한다. 단순 자살로 치부될 뻔했던 소희의 죽음은 유진을 통해 점차 진실이 드러난다.
<다음 소희>가 훌륭한 영화인 이유는, 소희의 죽음을 '진상'이나 '빌런'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는 열여덟 현장실습생의 죽음을 둘러싼 구조적 문제를 촘촘하고 차분하게 보여준다.
소희의 죽음은 막말과 성희롱을 일삼는 진상 고객만의 문제도 아니고, 진상 고객으로부터 직원을 지켜주지 않고 경쟁을 부추긴 하청회사만의 문제도 아니고, 하청회사에 과도하게 실적을 압박하고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 본사만의 문제도 아니다. 학생들이 어떤 환경에서 일하는지도 모른 채 인력 파견소가 되어버린 학교만의 문제도 아니고, 취업률로 학교의 실적을 평가하는 교육 당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모두의 부정의가 쌓이고 맞물려 열여덟 소희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영화를 보면서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듯이, 한 아이를 죽이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소희의 죽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몰랐다고, 내가 무슨 힘이 있냐고, 나보다는 저쪽이 잘못한 거 아니냐고 탓하기에 바쁘다. 이러한 반응에 오유진 형사는 분노에 차서 말한다.
"학생이 일하다 죽었는데 누구 하나 내 탓이라는 사람이 없어."
S초 교사의 죽음에도 교육 현장의 여러 구조적 문제가 얽히고설켜 있다. 그런 의미에서 '진상 부모'의 문제로만 이번 사건이 인식되고 있는 점은 매우 안타깝다. '진상 부모'만 사라지면 교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까. 진상 부모가 '악성 민원'을 쏟아내는 동안 학교는, 교육 당국은 대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었나. 교사와 학생 사이, 교사와 학부모 사이 혐오를 조장하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착잡하고 답답하다.
영화에서는 유진의 분투를 히어로물처럼 그리지 않는다. 평범한 형사 한 명이 경찰 조직을 바꾸는 것도,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당신이 막을 수 있었잖아, 왜 가만히 있었냐고"라며 화를 내는 유진에게 교육청 장학사는 딱하다는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적당히 합시다. 일개 지방 교육청 장학사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다음에는 교육부 가실 겁니까?"
유진 역시 소희의 죽음의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관리 팀장이 죽었을 때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고 덮은 것은 경찰 조직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거대한 음모론 같은 것은 없다. 모든 조직이 그렇듯 경찰에게도 사정이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배두나가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연기하는 유진을 자꾸만 응원하게 되는 것은, 유진이 누구도 하지 않았던 '상식적인 어른'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진은 소희의 죽음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바꿔야 할지 고민하는 유일한 어른이다.
'이렇게 해봤자 뭐가 변하겠어'가 아니라 '이렇게 했더라면 소희의 죽음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진지하게 곱씹는 사람. '다음 소희'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결국은 유진 같은 사람이 아닐까. 영화를 보면서 유진 곁에 더 많은 유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소희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세상은 거대한 빌런 한두 사람에게 통쾌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누가누가 더 잘못했나' 게임이 아니라, 한 교사를 죽이는 데 필요했던 '마을'이 무엇이었는지를 꼼꼼히 따져보는 것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다. 그래야 다음 죽음을 막을 수 있다. 숨진 교사의 명복을 빈다.
TV·OTT, 유튜브 등 영상 매체 속 심상치 않은 여자들을 사심 가득 담아 탐구합니다.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