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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an 23. 2019

속 깊은 후배의 한마디, 나는 무너졌다

[엄마의 퇴사] 퇴사할 때 들었던 말들

“사람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해요.
적어도 녹스 빌딩 15층엔 내 천직은 없어요. 당신들도 마찬가질 걸요?”



영화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한 장면. 안정적인 대기업을 그만두고 파리로 떠나겠다고 말하는 프랭크의 얼굴엔 생기가 넘친다. 양복에 중절모 쓰고 퇴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프랭크는 홀로 반짝인다. 그는 더 이상 수많은 부품 중 하나가 아니다. ‘이제 나는 저들과 다르다, 나는 진짜 인생을 찾아 떠난다.’ 프랭크는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낀다. 표정에 거만함이 묻어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면서 퇴사 일주일 전이 떠올랐다. 팀장에게 최종적으로 퇴사를 하겠다고 말한 게 목요일, 마지막으로 출근한 게 그다음 주 금요일이었다. 9년 가까이 다닌 회사였고 인사 나눌 사람도 많았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환송모임을 했고, 오후에 티타임을 가졌다.


퇴사를 결심했을 때 내 표정도 저랬을까. ‘나는 이제 너희와 다른 세상에 있는 사람이야. 아직도 너희는 거기서 그러고 있니? 참 딱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오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동료들의 생각은 모르겠지만^^)


즉흥적으로 파리행을 결심한 프랭크와 달리, 나는 징글징글할 정도로 오랫동안 퇴사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 사이 많은 선후배가 퇴사했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한동안 느낄 불안감과 박탈감이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만큼이나 계속 다니는 것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떠나는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키고 싶었다.


다만 숙제를 끝냈다는 후련한 마음은 있었다. 머리와 가슴이 터질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더 이상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그러자 내 퇴사를 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남겨진 사람들


대기업 사원 프랭크는 파리행이라는 꿈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이미지 출처 : CJ엔터테인먼트)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보며 흥미로웠던 건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삶의 가능성을 찾아 떠나겠다는 프랭크 부부의 선언에 동료와 이웃은 숙연해진다. 비현실적인 계획이라고 평가하면서도 불안감을 숨기지 못한다. ‘내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왜 저들처럼 떠나지 못하는 걸까.’ 눈빛이 흔들리고 말문이 막힌다.


영화에는 프랭크 부부와 친하게 지내는 솁-밀리 부부가 나온다. 프랭크 부부가 파리행을 알리고 집에 간 후, 남편 솁은 아내에게 말한다.


“솔직히 말할까? 파리 간다는 거 유치한 발상이야.”



그러자 밀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물을 흘린다.  


“그 말 들으니 살겠네.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누군가 퇴사한다고 할 때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보다 남아있는 자신을 걱정한다. 나도 그랬다. 퇴사한 동료를 만나면 어떻게든 그림자를 보려고 애썼다. 그래야 이곳에 남아있는 내 삶이 초라하지 않으니까. "아이가 없으니까""아직 젊으니까""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니까" 그들이 그럴 수 있는 이유와 나는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찾았다. 남아있는 것도 용기라고, 현명하고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나 자신을 합리화했다.


막상 내가 퇴사하는 입장이 되자 알겠더라. 사람들은 정말로, 당연히, 퇴사자보다는 자기 자신을 걱정한다는 걸. 기억에 남는 반응 두 가지.


1. 난 이제 어떡하지
2. 하고 싶은 일이 있다니 부럽다


첫 번째 반응은 너는 이미 숙제를 끝냈으니, 나는 이제 어떻게 하냐는 고민 상담형. 퇴사 일주일 앞두고 나는 여러 사람의 고민을 들었고, 회사의 미래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기는 했지만 뭐 나가는 마당에 이 정도야^^


두 번째 반응은 의외였다. ‘애 때문에 퇴사한다’는 이야기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아서 ‘꿈을 찾아 떠난다’고 대외적으로 알렸다. 다행히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있기도 했고. 그런데 연령불문, 많은 이들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니 부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회사 동료들뿐만 아니라 30대인 또래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너무 빨리 늙어버리는 게 아닐까. 씁쓸하고 안타까웠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장 난감했던 반응은


3. 그래서 뭐 할 건데.


이건 나도 퇴사하는 사람들에게 늘 했던 질문이었다. 어떤 이유 때문에 퇴사하는지, 그래서 뭘 할 건지. 당연한 호기심 아닌가. 그런데 막상 이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되니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왜냐면 나도 내가 앞으로 뭘 할 건지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퇴사하겠다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그 후에 뭘 할 것이며, 그것이 실현 가능한 계획인지까지 이야기하고 있자니 이게 무슨 면접 보는 건가 싶고,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시냐고요.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결국 파리행을 포기한 프랭크에게 직장 동료는 말한다.

 

"사실 좀 비현실적인 계획이었어. 안 그래?"


현실성을 따지기 시작하면 꿈은 무력해진다. 두 발을 버티고 서 있는 현실만큼 현실적인 건 없으니까. 돌이켜 보면 구구절절 그럴듯하게 계획을 설명하던 나도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냥 쉬겠다는 소리가 그렇게 어려웠을까.    


가장 힘이 됐던 반응은


4. 넌 뭘 해도 잘할 거야.


이 말을 떠올리면 지금도 울컥한다. 그냥 인사치레라 하더라도 마음이 든든해지고 힘이 난다. 나도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데 내 가능성을 믿어주는 것만 같아서. 그래, 나는 잘할 수 있으니까 너무 두려워 말자고 나 자신을 다독였다.  



다시 퇴사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퇴사 소식을 알리자 작은 선물과 엽서를 들고 찾아온 후배가 있었다. 입사는 늦었지만 나보다 퇴사 경험이 많은 후배였다. 내가 왜 그만두게 됐는지, 그래서 앞으로 뭘 할 건지. 지겹도록 설명할 준비를 하고 있는데 후배는 말했다.


그런 질문 너무 많이 들었을 테니 안 물어보겠다고. 다만 내가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을 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고, 고생했다고. 후배는 나를 다독였다. 속 깊은 후배 앞에서 주책없이 또 많이 울었다.


퇴사에 결정적인 이유 같은 건 없었다. 여러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쌓이고 쌓여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떠난 것뿐이다. 퇴사를 한다고 해서 당장 신세계가 열리지 않으리라는 것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고 마지막을 앞둔 지금.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을 축하받고 위로받고 싶었다. 후배는 그걸 알았던 것 같다.


다시 퇴사하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후배처럼 대하고 싶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힘들었겠다고, 그동안 잘했고,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니 지금을 즐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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