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반을 함께 한 친구를 보내며
친구가 죽었다.
라고 썼다가 지운다.
죽었다, 라는 말만큼 적확한 표현이 없는데 나는 아직 저 표현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
영정사진도 보았고,
핏기 하나 없는 친구의 마지막 모습도 보았고,
수의 입은 친구가 작고 딱딱한 관에 들어가는 것도 보았고,
그 관이 한 줌 가루가 되어 나오는 모습도 보았고,
신생아보다 더 작은 유골함에 친구가 담겨 나오는 모습도 봤는데.
울고 또 울고 너무 울어서 몸 안에 물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도 나는 못 믿겠다. 친구가 떠났다는 걸. 친구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어디서든 금방이라도 친구가 나타나 씩 웃을 것 같다. 하이톤의 빠른 목소리로 재잘거릴 것 같다. 지금이라도 “나 부산 왔어” 하면 경대 맥도널드 2층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이건 말이 안 된다. 이럴 순 없다. 이래선 안 된다.
친구를 만난 건 18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지금 내가 36살이니 인생의 절반만큼 친구가 내 삶에 있었다. 나 또한 친구에게 그랬을 거다. 함께 수능을 보고 재수학원을 다니고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에 가고 직장을 구하고... 인생의 커다란 고비고비마다 늘 친구가 있었다.
자주 연락하는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1년에 몇 번은 카톡과 전화를 하고, 1년에 한 번 만나도 마치 어제 만난 것처럼 인생의 맥락을 아는 사이. 앞으로도 당연히 계속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소원할 때도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친구와 나의 기쁜 일과 슬픈 일에 서로가 있을 거라고. 우리 둘은 함께 늙어갈 거라고.
친구는 내가 서른다섯 해 넘게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많았고 늘 에너지가 넘쳤다. 빽빽한 다이어리와 계획표를 메우던 친구의 글씨체가 또렷하다. 남들은 안정적이라고 하는 교대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의 길을 걸으면서도 친구는 늘 새로운 일에 도전했다. “대단하다, 대단해. 근데 몸 좀 챙기면서 해.” 내가 친구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어릴 때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친구는 철이 너무 빨리 들어버렸다. 내가 부모님과 싸우고 부모님을 원망할 때 친구는 가장이 되어 부모님을 챙겼다. 동생을 돌봤다. 그러면서도 힘들다는 이야기 한번 한 적 없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이 능력이 되니 다행이라고 했다. 다들 친구를 밝은 아이로 기억했다.
너무 많은 짐을 안고 살아가면서 친구의 몸에는 자주 과부하가 걸렸던 것 같다. 멀쩡하게 만나고 집에 잘 들어갔냐고 물으면 응급실에서 수액을 맞고 있다고 했고, 특히 다리 때문에 마지막까지 두고두고 고생을 했다. 더 이상 피가 돌지 않는 친구의 몸을 어루만지며 친구의 부모님과 동생은 몇 번이나 말했다. 그곳에는 아프지 말라고. 다리 아프지 말고 아이들이랑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라고.
지난해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조금은 뾰족했던 친구의 모습이 계속 생각난다. 시간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다시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겠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한 달 전에 카톡 했을 때는 어땠더라. 그날은 너무 정신없고 바빴고 많이 힘들었다. 친구의 안부인사에 건성으로 답했다. 여유 생기면 다시 연락해야지, 조금만 상황이 정리가 되면.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다.
장례식에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너무 바쁘고 정신없었다고, 연락해야지 하면서도 연락을 못했다고. 너무 후회된다고. 대체 우리는 뭘 하느라 그렇게 늘 바쁘고 정신없는 걸까.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며 사느라고.
변명 같지만 친구가 떠난 날도, 그 전날도 나는 친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자주 연락하고 만나지는 못해도 친구를 마음속에서 잊은 적은 없었다.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가 늘 거기에 있을 거라고.
사고 나던 날, 내가 미리 약속을 잡았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또 한다. 마지막까지 장례식장을 지키는 내게 가족과 지인들은 친구 잘 뒀다고, 고맙다고 했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정말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맞는 걸까.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자격이 있는 걸까.
이어지는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 다 무슨 소용이 있나.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친구는 돌아올 수 없는데.
원망할 사람이 없으니 나는 나를 원망하고 애꿎은 사람들을 원망한다. 화장을 곱게 하고 장례식장에 온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장례식장에서 나만큼 슬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화가 나고, 지하철에서 웃는 사람들에게 화가 난다. 댄스 음악도 예능도 다 화가 난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친구가 남긴 흔적을 찾아본다. 사진을 찾고 편지를 찾고 싸이월드 비밀번호를 찾고 친구에 대한 추억을 나눌 수 있는 옛 친구들을 찾는다. 그럴 때면 친구가 잠시라도 함께 있는 것 같다.
부산 집을 뒤져 친구가 보낸 편지를 찾았다. 2006년. 내가 호주에 워킹홀리데이를 갔을 때다. 편지에는 스물세 살 친구의 혼란과 고민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홍아 보고 싶다. 수다 떨고 싶고. 실컷 웃고 싶네. 그리고 같이 미래를 보고 싶다.”
편지를 읽다 미래, 라는 말에서 나는 숨을 골랐다. 나도 친구와 같이 미래를 보고 싶다. 친구가 보고 싶고 수다 떨고 싶고 실컷 웃고 싶다.
친구와 셋이 함께 친했던 또 다른 친구는 말했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우리 둘이 만나면 친구가 없다는 게 정말 현실이 될 것 같다고.
나는 말했다. 그럴수록 더 만나야 한다고. 추억하지 않으면 친구는 없던 사람이 되어버린다고. 남겨진 사람들은 남은 기억을 안고 계속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고. 나는 스스로도 그 무게를 알지 못하는 말들을 늘어놨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있으니까, 보고 싶을 때 만날 수는 있잖아' 차마 그 말을 하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친구를 보낸 만우절 날. 부산 하늘은 시리도록 파랬다. 만발한 벚꽃잎이 세찬 바람에 흩날렸다. 친구의 화장을 기다리면서 나는 가족들 틈에 앉아 혼자 밥을 먹었다. 친구가 떠났는데도 배가 고프고 밥이 넘어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서울에 오는 길. 나는 루시드폴의 ‘아직, 있다’를 듣고 또 들었다. 루시드폴이 세월호 아이들을 위해 만든 노래.
“손 흔드는 내가 보이니
웃고 있는 내가 보이니
나는 영원의 날개를 달고
노란 나비가 되었어.”
“꽃들이 피던 날
난 지고 있었지만
꽃은 지고 사라져도
나는 아직 있어.”
노래를 듣는데 친구가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그제야 친구의 죽음이 실감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