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전 알았다면 좋았을 것들] 버티고 부딪치는 건 중요하지만
새해가 되면서 두 번째로 투자심사를 받을 기회가 생겼다. 이제는 누가 대표로 이 사업을 이끌어 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퇴사 후, 사람들은 나를 장난스럽게 ‘홍대표’ ‘홍사장’이라고 불렀다.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편집장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 대표도 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비즈니스 모델과 내 역할을 구체적으로 고민하면서 점점 회의가 들었다. 내게 과연 사업가 자질이 있는 걸까. 아니, 정말로 대표가 하고 싶은 걸까.
조직의 리더가 되어 구성원들을 이끌어가는 건 힘들지 않았다. 생각보다 큰 그림을 보면서 지적하고 쪼는 데 재능이 있었다(누군가는 내 후배가 아닌 게 천만다행이라 했…) 구성원들의 생각을 조율하고 최종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게다가 감투 욕심도 있었다^^(어릴 때 반장을 못 해봐서…)
나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을 가장 잘했고 또 하고 싶었다. 내가 만드는 콘텐츠가 내가 생각하는 타깃 독자층에 소구해 수익까지 창출하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양질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최우선이었지만, 어떻게 수익구조를 만들어 나갈 것인지 사업적 고민도 필요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업가와 내가 다른 유형의 사람인 건 분명해 보였다. <다가오는 말들>에서 작가 은유는 말한다. “글은 자기 생각을 의심하는 일이고, 말은 자기 확신을 전하는 일”이라고. 나는 전자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글을 쓰면서도 계속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사람, 확신하는 걸 경계하는 사람.
내향적 인간이라 사람을 만나는 데도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인싸 코스프레를 할 수는 있었지만 그 몇 배만큼 혼자 충전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숫자에 약했고 시장에서 물건값 흥정하는 것도 잘 못 했다. 돈을 많이 벌거나 크게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사람도 사업을 할 수 있을까. 사업은 내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 아닐까.
이건 취재기자로 일할 때도 똑같이 들었던 고민이었다. 나는 내 감정과 타인의 감정에 지나치게 예민했다. 기자들은 밤이고 낮이고 시도 때도 없이 질문을 던져 원하는 답을 얻어내야 한다. 상대방이 준비가 됐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취재해야 한다.
가족을 잃은 사람에게도 스마트폰을 들이대야 하고, 세월호 사태에서 볼 수 있듯 더 큰 비극일수록 더 좋은 뉴스 ‘꺼리’가 된다. 새벽이나 밤늦게 전화하면 실례인 것 같아 마음 불편하고, 타인의 비극을 소재로 삼는 것 같아 마음 불편한 사람이 기자 생활을 하기는 어려웠다. 이런 내게 누군가는 맷집이 약하다고, 누군가는 기자정신이 없다고 했다.
기자는 어쨌거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데 나는 질문 이전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전 직장에는 비슷한 이유로 취재부서를 나온 사람이 몇 있었는데 우리끼리는 스스로를 ‘선비형 인간’이라고 자조하기도 했다. 선비의 문제의식은 있지만 상인의 현실감각은 갖지 못한 사람들. 취재기자로 사는 건 내게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었고, 편집부로 부서를 옮겼다.
해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편집부로 옮긴 후, 내가 기획과 편집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필진을 발굴하고 소통하고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일이 즐거웠다. 첫 번째 독자가 되어 좋은 글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경험도 보람 있었다. 그 글이 다른 독자들에게 사랑받았을 때 느끼는 짜릿함과 뿌듯함. 이건 내가 편집기자를 해보지 않았다면 결코 몰랐을 것들이다.
마더티브 영상 콘텐츠도 마찬가지다. 나는 글 쓰는 사람이었고 영상에서 말을 하게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 못했다. 영상을 찍을수록 글 쓸 때와는 다른 종류의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점점 어색함도 사라졌다. 부딪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있다. 어쩌면 사업도 그런 걸지 모른다.
‘제가 사업을 할 수 있을까요’. 나와 같은 직장에 다니다 ‘진실탐사그룹 셜록’을 창간한 박상규 선배는 내 고민을 듣더니 말했다. 어차피 지금은 비즈니스 모델 고민한다고 해도 절대 안 나온다고. 꾸준히 콘텐츠 쌓다 보면 언젠가 길이 보일 거라고. 그때까지 버티라고.
회사에서 팀장 한번 해본 적 없고 맨날 세계여행 이야기만 하던 상규 선배가 박사장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본인도 그랬다고 한다. 처음 몇 년은 너무 힘들어서 불면증과 우울증까지 왔었다고. 그런데 계속 버티다 보니 길이 보였다고.
선배의 말처럼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서 ‘사업 체질’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한 사업가의 페르소나 역시 진실이 아닐지도 모르고. 세상 모든 사업가가 같은 유형일 필요는 없으니까.
그럼에도 사업으로서 마더티브를 접기로 한 건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서였다.
2차 투자심사를 받고 최종적으로 우리 쪽에서 투자제안을 철회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가장 아쉬웠던 건 우리에게 비즈니스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다는 거였다. 우리는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었지, 콘텐츠로 돈 벌어보는 경험은 누구도 해보지 못했다. 돈 버는 일은 경영진이 했으니까. 어떤 비즈니스 모델도 현실에 뿌리내리지 못한 두루뭉술한 가설일 뿐이었다.
내가 퇴사했던 이유를 떠올려 봤다. 사업을 하거나 프리랜서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다.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회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술을 익히고 싶었다. 마더티브 활동을 1년 남짓 하면서 9년 회사 생활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게 됐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투자나 인정이 아니라 경험, 다시 말해 조금씩 역량을 쌓는 거였다. 이것도 퇴사를 하고 창업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다.
우리 사회는 도전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부딪치고 깨져서 끝내 이기리라, 같은 성공신화. 내가 나를 넘어선 이야기.
취재부서에서 나온 후 나는 수년간 강한 열패감에 시달렸다. 같이 입사한 동기들은 계속해서 커리어를 쌓아갈 텐데.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투자제안을 철회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낙오자가 된 것 같았다. 내 이마 위에 ‘실패’라는 낙인이 새겨진 것 같았다.
버티고 부딪치는 건 중요하다. 문제는 지금, 내가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냐는 거다. 모두가 성공신화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내가 기대했던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아직 나는 사업할 역량이 안 된다는 걸.
그럼 이제 뭘 할까. 처음으로 구직사이트를 들락거리고 있을 때 한 업체에서 보낸 메일을 받았다. 마더티브 콘텐츠 정말 잘 봤다고, 함께 할 수 있는 게 있을지 만나서 얘기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답장을 안 할까 하다가 연락이 왔으니 한번 만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직 제안을 받았다.
뭐든 해본 경험은 예상치 못한 기회로 이어졌다. 나는 새 직장에 다니게 됐고 아침마다 출근하는 삶을 살고 있다.
“엄마, 회사 잘 갔다 와. 차 조심해. 자전거랑 오토바이 조심해. 엄청 빨리 달려.”
세 돌이 지난 아이는 이제 엄마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할 정도로 많이 자랐다. 지난해 퇴사할 때만 하더라도 일과 육아 사이에 끼어 늘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시간이 해결해주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현관문을 닫고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내가 회사 체질이 아닐까 종종 생각한다. 매일매일 출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게 좋고 안정적으로 수입이 있다는 게 좋다. 4대 보험 걱정하지 않아도 돼서 좋다(이것도 얼마 갈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도 나는 콘텐츠 만드는 일을 하고 있고, 전혀 새로운 분야를 배워가고 있다. 마더티브를 함께 했던 멤버 1명도 같은 회사로 함께 이직했다. 사람 일은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른다.
얼마 전 사주를 보았다. 사주 아저씨는 내게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정말 힘들지 않았냐고, 그건 60년에 한 번씩 오는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라고 말했다. 내가 퇴사를 하고 마더티브에 한창 몰두했던 시기와 겹쳤다. 하루에도 열두 번씩 멘털이 탈탈 털리던 날들.
그럼에도 퇴사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나는 말한다. 뭐든 해야 무슨 일이든 생긴다고. 당장 퇴사할 수 없다 하더라도 뭐든 해보라고. 그래야 기회가 생긴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