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행] 나는 늘 앞북을 쳤다
퇴사하면 꼭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가 독립출판이었다. 수년 전 퇴사에 대한 기획을 고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딴짓 매거진’ 멤버들이 하는 독립출판 수업을 신청했다.
어떤 책을 내고 싶은지, 어떤 내용을 쓰고 싶은지 정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 쓰고 싶은 글이 넘치던 시기였다. ‘엄마의 퇴사’라는 제목의 책을 기획했고 착실히 원고를 쌓아 나갔다.
그러다 20년지기 친구와 단둘이 치앙마이 여행을 가게 됐다. 남편의 퇴사 선물이었다(라고 쓰고 쟁취라고 읽는다). 아이와 떨어져 글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은 소중했고, 하루빨리 퇴사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고 싶었다.
일주일간 매일 카페에 틀어박혀 글을 썼다. 친구는 친구대로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 주지 않고 따로 또 같이 여행했다.
치앙마이 여행을 떠올리면 카페와 노트북만 생각난다. 제대로 찍은 사진 한 장 없어 내가 치앙마이에 다녀온 건 맞나 싶기도 하다. 치앙마이? 엄청 더웠던 맛집 이름인가... (치앙아미에서 먹은 곱창이 정말 맛나기도 했다)
그렇게 원고를 다 완성했는데 디자인이 문제였다. 타고난 기계치라 인디자인부터 막혔고, 어쩌지, 어쩌지 하다 사업계획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독립출판은 결국 흐지부지됐다. 독립출판보다는 사업이 더 중요했으니까. 책은 나중에 시간 될 때 만들지 뭐.
처음 독립출판 수업을 들을 때만 해도 책 한 권 만드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글쓰기와 편집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었고, 이미 출판사와 책 두 권을 낸 경험이 있었다.
그런데 점점 수업이 뒤로 갈수록 딴짓 시스터즈가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기획하고 취재하고 글쓰고 글 모으고 편집하고 디자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유통 전반에 걸친 모든 일을 세 사람이 해오고 있었다. 그것도 4년 동안이나. 본업도 아닌 딴짓으로.
나의 퇴사 멘토이기도 한 ‘딴짓 1호’ 초롱씨는 처음에는 정말 시행착오가 많았다고 했다. 세 사람은 독립출판 수업에서 처음 만났는데 첫 책을 내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고 했다. 그만큼 처음이 힘들었다고.
이제 딴짓 시스터즈는 세 명이 완벽히 역할을 나눠 따로 또 같이 일하고 있다. 독립출판 하고 싶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워크숍을 열고, 지난해에는 종로에 ‘틈’이라는 공간을 오픈해 ‘퇴근 후 딴짓’을 장려하고 있다. 꾸준히 수익모델도 만들어가고 있다. 12호를 준비하고 있다는 초롱씨에게 말했다. 이러다 독립출판계 ‘전원일기’로 거듭나는 거냐고.
함께 수업을 들었던 수강생 중에는 전남 해남에서 온 분도 있었다. 매주 토요일 새벽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왔다가 오후에 다시 기차를 타고 돌아간다고. 초롱씨는 전국 각지에서 수강생들이 와서 깜짝 놀란다고 했다.
블로그를 찾아보니 독립출판 하는 사람이 의외로 정말 많았다. 인쇄소에 직접 찾아가 종이를 고르고 감리를 보고 구청에 가서 출판사 등록을 하고 작은 서점을 찾아다니며 책을 입고하고. 이 복잡한 과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해낸 사람들이. 독립출판을 쉽게 생각했던 게 부끄러워졌다.
치앙마이 여행에서 카페와 노트북 그리고 한 가지 더 떠오르는 게 있다. 티모시 샬라메. 숙소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 넷플릭스로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봤다. 그리고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에 푹 빠졌다.
그들의 사랑은 현재 시점이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미련,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없었다. 오직 그들이 사랑하는 현재만이 중요했다.
“어떤 삶을 살든 그건 네 마음이다. 다만 이것만 기억해. 우리 몸과 마음은 단 한번만 주어진 것이고 너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닳고 닳게 된다는 걸. 지금은 슬픔과 아픔이 있어. 그걸 없애지 마라. 네가 느꼈던 기쁨도 말이야.”
올리버를 향한 엘리오의 마음을 지켜보며 나는 엘리오가 받을 상처를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엘리오의 아버지는 말한다. 빨리 치유되기 위해 바로 지금, 니가 느낀 감정을 없애지 말라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려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게 만들지 말라고.
어쩌면 순서가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치앙마이에서 독립출판을 위한 글을 쓰고, 책 만들어야 할 때는 사업계획서를 쓰고, 창업하고 나서는 내실과 역량을 다지기 전에 수익 걱정부터 했다. 자꾸만 스텝이 엉키고 체했다.
현재에 몰입하지 못한 건 불안감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앞북을 치는 사람이었다.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지레 걱정하고 최악의 상황을 상상했다. 대학 다닐 때는 취업 걱정을 했고, 취업하고 나서는 퇴사 걱정을 했고, 퇴사하고 나서는 이직 걱정을 했다. 여행 전에는 여행지에서 생길 일을 걱정했고, 여행 가서는 일정의 절반쯤 지나면 벌써부터 돌아갈 걱정을 했다.
남편과 스페인 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몇 달이나 준비해서 여행을 가놓고는 2주 일정 중 1주일이 지나자마자 우울해졌다. 여행이 너무 행복한데 돌아가면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아서. 한국에 돌아가면 뭘 할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를 대비하며 살았다. 그러니 늘 욕심을 부리게 됐다. 이것 저것 한발씩 걸쳐놓고 한번에 다 하려고 했다.
한때는 그게 효율이라 믿었던 적도 있다. 결과적으로는 무엇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고는 뒤늦게 과거를 후회했다. 지금처럼 말이다.
적당히 발을 걸쳐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야 얻을 수 있는 것들. 발로 뛰어다니며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확인하며 만들어 내야 하는 것들. 그런 것만이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에 쌓인다.
식탁에 쌓여있는 읽다 만 책을 바라본다. 여러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고 책 한 권 읽는 데 드는 시간이 줄어들지 않는다. 한 권을 읽는 데는 한 권 만큼의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손 안에 있는 책에만 몰입해야 한다.
이번 여행에서는 오직 현재만 생각하기로 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걱정이 스물스물 올라올 때마다 하늘과 바다를 바라봤다. 바로 지금만. 남편과 아이 나, 세 사람이 함께 하는 오늘 딱 하루만. 이 순간은 두번 다시 오지 않을 테니까.
이런 여행이 얼마 만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어쩌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