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행] 사라지지 않는 것들
발리에서의 나날은 비현실적이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도 날씨도 일상도 모든 게 비현실적이라 여기서는 모든 걸 다 잊을 수 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는지도.
가끔 공기 속을 유영하듯 멍한 기분이 든다. 현실에 전혀 발을 딛고 있지 않은 느낌. 오랜만의 휴식이 달콤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잘 지내도 되나 싶다.
한 달 가족여행을 떠난 건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한 달도 안 됐을 때였다. 수개월 전부터 예정된 여행이었고, 나는 어서 한국을 떠나고 싶었다.
사누르 해변에 누워 친구에게 마지막으로 보냈던 영혼 없는 카톡을 떠올리고, 장례식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던 나를 떠올렸다. 그렇게라도 나를 싫어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발리에는 여자 둘이 여행 온 사람이 많았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만 내 눈에 들어왔는지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어린 시절 친구들과 만나기 어려워졌다.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들은 특히 그랬다. 친구도 그중 하나였다.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예전처럼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마흔이 지나고 아이가 엄마를 절실히 찾지 않게 될 때 여자들은 다시 뭉친다고 하니까. 언젠가 여행도 다녀올 수 있을 거라고.
가볍고 예쁜 옷차림으로 함께 돌아다니는 여자들을 보며 친구와 단둘이 갔던 여행을 떠올렸다. 교환학생으로 일본에 머물고 있던 친구를 만나러 간 어느 여름. 그때가 스물네 살이었던가, 다섯 살이었던가.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해외에 나간 건 그때가 생애 두 번째였다. 독산동의 한 보습학원에서 영어강사 알바를 해서 번 돈으로 일본행 티켓을 끊었다. 홀리데이는 없고 워킹만 가득했던 워킹홀리데이를 제외하면 첫 해외‘여행’이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 일본어 두 가지를 배웠다. 아쯔이(덥다). 사이 아크(최악). 일본의 여름은 덥고 습했다. 덥다, 최악이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리타 공항에 마중 나온 친구의 현란한 옷차림을 보며 나는 노홍철 아니냐고 놀려댔다. 친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만의 패션 세계를 고집했다. 우리만의 티키타카.
교토와 나라에 들른 우리는 오사카로 갔다. 오사카에는 친구의 일본인 친구가 있었다. 일본인 친구의 다다미방에 둘러앉아 마트에서 떨이로 사 온 도시락과 맥주를 홀짝이던 기억, 오사카 중심가에 갔다가 한국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놀랐던 기억... 토막 난 기억이 불쑬불쑥 떠올랐다. 그게 친구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갔던 여행이 되었다.
친구가 떠난 후,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게 힘들면서도 누군가에게 친구 이야기를 계속 털어놓고 싶었다.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나와 어떤 추억을 쌓았는지.
여행지에서는 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밖에 없었다. 나는 고민했다. 여행 와서 죽은 사람 이야기를 하는 게 맞는 걸까.
친구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돼 남편은 사촌동생을 잃었다. 친구의 부고만큼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친구 얘기를 꺼내서 괜히 남편 마음을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나는 자꾸만 말을 삼키게 됐다. 하지 못한 말이 목에 걸렸다.
그러다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에서 동준군 어머니 이야기를 읽게 됐다. 현장실습생이었던 동준군은 일터 내 괴롭힘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동준군 어머니는 아들이 죽고 난 후 가족들, 친구들을 만나는 게 힘들다고 토로했다. 자신도 자식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사람들이 죽은 자식 이야기만 꺼내면 불편해 한다며 속상해했다. 다른 자식 이야기를 듣기 싫은 게 아니라, 자기도 아들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살고 죽고 아프고 병들고 생로병사도 삶이에요. 결혼하고 연애하는 것만 삶이 아닌데, 그것도 삶이고 그 과정을 이기는 것도 삶인데 왜 그런 얘기를 편안하게 못 들어 넘기냐. 그게 서운하죠.”
결혼하고 연애하는 것만 삶이 아니라 생로병사 모두 삶이라는 말. 아들은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엄마의 삶 속에, 기억 속에 계속 살아간다. 내게 친구가 그런 것처럼.
책을 읽으며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아들과 손주, 그리고 아들의 전처인 며느리에게 엄마는 카레국수를 정성스레 만들어준다. 냉동실에 얼려뒀던 카레를 꺼내서 녹이고 국수를 삶는다. 며느리가 카레가 맛있다고 하자 엄마는 말한다.
“그렇지? 가다랑어 국물로 만들었어. 애들 아버지가 좋아해서 엄청 만들어서 냉동 시켜뒀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맛있게 카레를 먹던 아들의 표정이 변한다. 뭐냐고. 그럼 이게 반 년 전 만든 음식이냐고.
카레를 좋아하던 아버지는 죽었다. 카레는 남았다. 남은 사람들은 죽은 아버지를 위해 오래전 만들어놓은 카레를 함께 먹는다.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 삶과 죽음은 생각만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나는 그걸 친구를 보내고서야 알게 됐다.
사누르 메인 거리에 있는 재패니스 레스토랑에 간 날, 일찍 잠든 아이를 다다미방에 눕혀놓고 남편과 마주 보고 앉았다. 나마비루와 함께 오꼬노미야끼를 시켰다. 나는 남편에게 친구와 함께 일본 여행갔던 이야기를 늘어놨다. 마치 친구가 지금도 살아있는 것처럼.
“나랑 친구랑 오사카에서는 일본인 친구 집에 있었잖아. 오사카에서 철판 오꼬노미야끼를 먹었는데 진짜 맛있었어. 그 일본인 친구한테도 친구 소식을 알려야 할 것 같은데 방법이 없는 거야. 그 친구 한국에 왔을 때도 나랑 같이 봤었는데. 그 친구 이름이 뭐였더라...”
오꼬노미야끼가 생각난 건 정말 오랜만에 뒤져본 싸이월드 때문이었다. 친구의 일본인 친구와 내가 나란히 앉아 오꼬노미야끼 앞에서 (지나치게) 귀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 나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기억이 잘 안 나. 이게 진짜 기억인지 사진을 보고 생긴 기억인지도 잘 모르겠어. 문자나 카톡은 폰 바꾸거나 초기화하면서 다 지워져 버렸고... 친구와 나 사이에 남은 게 별로 없는 거야. 2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 보냈는데, 어떤 시절은 아예 기억이 잘 안 나.”
애써 밝은 척 했지만 나는 이미 울고 있었다. 남편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기억 잘 안 나지. 느낌만 있는 거지. 그때 좋았다, 이런 거. 그거면 된 거야. 그때는 행복했으니까. 친구도 행복했을 거야.”
남편은 잊게 될 거라고 했다. 나중에는 애써 기억하지 않으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을 날이 올 거라고. 몇 년 전 각별했던 외할머니를 보낸 후 남편은 많이 힘들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할머니 얼굴도 잘 생각안 날 때가 있다고 했다.
사는 게 참 얄궂다, 남편과 나는 말했다. 그날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 먼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눴다. 속이 조금은 후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