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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밀밀 Jun 11. 2018

이런 어른이 되고 싶진 않았어

나는 실패의 서사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엄마는 대학 이름으로 친구들을 기억했다. 시간이 흐르자 대학 이름은 직장 이름으로 바뀌었다. 기준은 명확했다. 대기업, 공무원 아니면 다 그저 그런 애들. 친구를 평가하는 기준 역시 분명했다. 결혼은 했는지 애는 있는지 남편은 돈 잘 버는지. 너무나 세속적인 기준들. 


요즘은 대기업 들어가서 퇴사하는 사람도 많다, 대기업 들어가고 공무원 된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지 않나, 결혼을 왜 꼭 해야 하나, 애 없이도 잘 살 수 있다, 세상이 변하고 있다고 아무리 말해줘도 소용 없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안정적인 직장을 다녀도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건 엄마 입장에서는 배부른 이야기였다. 엄마의 세계에서는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한 문제였으니까.


엄마의 기준으로 본다면 나는 비교적 성공한 인생을 살아왔다. 남들이 알만한 대학을 나와서 남들이 알만한 직장에 들어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 남편 역시 그리 다르지 않다. 엄마의 속물적 기준에 늘 딴지를 걸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기준을 너무나 잘 따르며 살아온 것이다.


내 삶은 다르지도 틀리지도 않았다 


기자로 일하면서 대안적 삶에 대한 취재를 많이 했다. 안정된 직장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방으로 떠나거나 가난하고 불편한 삶을 기꺼이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런 이야기를 취재하고 또 글로 쓰면서 가슴이 뛰었다. 독자들도 그러기를 바랐다.

 

달라도 괜찮다고, 다른 게 틀린 건 아니라고 말해왔지만 내 삶은 그리 다르지도 틀리지도 않았다. 세상이 보통, 평균, 정상이라고 정해놓은 선에서 벗어나는 게 너무나 두려웠다.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막상 그 길을 가지 못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아이를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나보다 늦게 결혼한 친구가 아이를 가졌다고 조심스럽게 알려왔을 때. 우습지만 이러다 뒤처지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제때 대학을 가고 제때 직장에 가고 제때 결혼하고 제때 아이를 가지는 안전한 사이클에서 낙오하는 게 아닐까. 지긋지긋한 모범생 콤플렉스. 


어쩌면 나는 실패의 서사를 너무 많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재수를 하다가 삼수, 사수 끝에 결국 수능 낭인이 된 사람, 기자가 되려고 언론고시를 준비하다가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직장에 들어간 사람, 오랜 연애 끝 이별 후 더 이상 연애를 하지 못하는 사람, 안정된 직장을 그만둔 후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 불안정한 직업을 갖고 구직과 퇴사를 반복하는 사람... 엄마의 기준, 세상에 기준에 따르면 분명 ‘실패’한 사람들.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민감한 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실패의 서사들 


첫 번째 남자 친구와 8년 연애하고 결혼했고 첫 번째 직장을 8년 넘게 다녔다. 이별을 겪어본 적도 퇴사를 해본 적도 없다. 어쩌면 나는 실패하는 게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나름 진보매체라는 곳에서 일하며 변화 혁신을 말했지만 정작 내 삶은 극보수였다. 


취재기자와 편집기자로 살아온 8년간 나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사람, 팔짱을 끼고 관조하는 사람, 비평하는 사람, 냉소하는 사람이었다. 퇴사 후 새로운 삶을 모색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늘 그림자를 보려고 애썼다. 돈은 많이 버는데 애 볼 시간이 없대, 돈 아끼려고 부모님 집에 들어가서 산다던데, 프리랜서로 사는 건 더 전쟁이래, 시골 가서 사는 일도 보통이 아니라더라, 거봐 창업은 쉽게 하는 게 아니라니까. 나름의 정신승리 방법이었다. 내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게 있었다. 그들은 ‘뭐라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자리에 있다는 것. 물론 버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에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여 사는 남자 료타가 나온다. 젊은 시절 문학상을 받은 적이 있는 그는 늘 유명 작가를 꿈꾸지만 현실은 남의 사생활이나 캐고 다니는 흥신소 직원이다. 어른이 돼서 이런 일이나 하고 다니냐고 묻는 고등학생에게 료타가 던진 대사. “원하는 어른이 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내가 기억하는 대사는 이렇다) 


그 말이 요즘 계속 생각이 난다. 안전하고 안정된 것만 쫓으며 사는 삶. 이런 어른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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