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행]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부끄러움이 된다
오전 9시 넘어 사누르 해변을 찾았다. 며칠 흐렸다가 다시 쨍하게 맑은 날씨.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희미하다. 새하얀 구름이 그림처럼 떠다녔다.
더운 몸을 안고 물속에 뛰어들려는데 평소에 비해 해초가... 많아도 너무 많다. 쓰레기도 둥둥. 해초와 쓰레기를 헤치고 좀 더 깊이 들어가 봤지만 물이 평소보다 탁한 느낌이다.
자리를 옮겨 봐도 마찬가지다. 오늘이 노동절이라 쉬는 날이라서 관리가 안 됐나?(근데 발리도 오늘이 노동절 휴일인가) 파도가 약해서 그런가. 원래 이 시간에는 이런가. 남편과 나는 여러 가설을 세웠다.
바다에는 온갖 쓰레기가 버려져 있었다. 플라스틱 물병, 빨대, 과자 봉지, 심지어 기저귀까지... 대체 왜 해변가에 이런 쓰레기를 버리고 가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조금만 수영하다 밖으로 나와버렸다. 아이는 바다에서 더 놀고 싶다며 아쉬워했다. 몸도 마음도 영 찝찝했다. 샤워가 간절했다.
이루미를 만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수영장과 해변에서만 노는 게 슬슬 지겨워졌을 때쯤, 남편은 근처에 거북이 방생 센터가 있다는데 가보지 않겠냐고 했다.
여느 아이들처럼 날날이도 동물을 좋아했다. 발리 도처에서 볼 수 있는 도마뱀과 벌레는 4살 아이에게 좋은 친구였다.
우리 부부는 동물이 아이의 장난감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아이가 동물을 자신과 똑같이 감정이 있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동물이 있는 곳에 갈 때는 늘 신중해졌다.
남편은 블로그에서 후기를 찾아보더니 상업적이지 않은 곳 같다고 일단 한번 가보자고 했다. 거북이를 만나러 간다고 하자 아이는 신이 났다.
숙소에서 택시를 타고 스랑안 거북이 보호 교육센터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살짝 놀랐다. 너무 허름해서. 우리처럼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들이 여럿 보였다. 햇살이 뜨거웠다.
센터 안으로 들어가니 허리 높이 정도 오는 커다란 수조 여러 곳에 거북이들이 헤엄치고 있었다. 이곳에선 다친 거북이들을 구조하고 치료해 바다로 다시 돌려보낸다. 거북이 종류가 이렇게 많았구나… 아이는 아빠 품에 안겨 한참이고 거북이를 들여다봤다. 남편은 거북이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는지 아이에게 설명해줬다.
바다거북 어미는 육지로 나와 수십 마리의 알을 낳고 바다로 다시 떠난다. 거북이 알은 인간을 포함한 포식자들의 먹잇감이 된다. 스랑안 센터에서는 거북이 알 부화를 돕고 어느 정도 자란 새끼 거북이들을 단체로 바다에 보내준다고 했다.
발리 돈으로 15만 루피(한화로 12000원)를 내면 거북이를 입양해 방생할 수 있다. 센터에서 날짜를 정해 일괄적으로 거북이를 방생하고 그 영상을 보내준단다.
먼저 어떤 거북이를 입양할지 골랐다. 어른 손바닥 절반 크기만 한 거북이 수십 마리가 수조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다 똑같아 보이는 거북이들 사이에서 아이는 조심스럽게 한 마리를 손으로 가리켰다.
“날날아, 이 거북이는 날날이 동생이야. 동생 이름 뭐라고 할까?”
“이름? 이름이?”
그렇게 거북이 이름은 이름이 아니고 ‘이루미(YIRUMI)’가 되었다. 이루미와 인사를 나누고 아이는 입양 증서와 함께 조악한 목걸이를 선물로 받아왔다.
이루미를 만난 후, 우리 세 식구의 삶은 조금 달라졌다. 빠방이와 공룡만 외치던 아이는 유튜브에서 이루미 영상을 보여달라고 했다. 아이와 함께 바다 거북 영상을 찾아보고,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거북이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지 함께 공부했다. "사람들 나빠." 네 살 아이가 말했다.
며칠 후 센터에서는 이루미가 다른 수많은 거북이 친구들과 함께 경쾌한 음악에 맞춰 바다로 행진하는 영상을 보내줬다. 아이는 이루미의 모습을 보고 또 봤다. 저 작은 거북이가 바다에서 잘 살아남을 수 있을까.
바다로 돌아간 이루미를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발리에서는 올해부터 일회용 비닐봉지, 플라스틱 빨대, 스티로폼 사용이 전면 금지되었다. 마트에는 다회용 가방을 들고 다녀야 하고 카페에서는 플라스틱 빨대를 주지 않는다. 우리는 발리에서 종이 빨대, 대나무 빨대, 스테인리스 빨대를 모두 경험했다.
발리 주정부에서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이 금지하는 데는 한 10대 소녀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발리섬에 사는 18살 소녀 멜라티 위즌은 12살 때 발리 해변에 쌓인 해양 쓰레기를 보며 비닐봉지(플라스틱 백) 없는 발리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중국 다음으로 해양 쓰레기 배출이 많은 나라다.
그는 당시 10살인 동생과 함께 ‘바이 바이 플라스틱 백(BBPB)’이라는 비영리 단체를 만들고 환경운동을 벌였다. BBPB은 현재 발리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활동을 확장하고 있다. 멜라티 위즌은 지난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청소년들의 외침이 이렇게 큰 변화를 이끌어내다니, 감동적이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가슴이 이래저래 뜨거워졌다.
플라스틱 프리(Plastic Free), 당연히 좋지. 필요하지. 그동안은 추상적으로만 생각했다면 발리에 와서는 플라스틱 프리의 필요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일회용 플라스틱을 쓸 때마다 내가 버리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에서 나와 아이가 수영을 하고, 이루미가 헤엄 치는 모습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바다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니는 10대들의 모습도. 죄책감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아는 것은 부끄러움이 되었다. 관광지에 와서 자연의 단물만 쪽 빨아먹고 자연을 망치고 떠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여행하는 동안만이라도 책임지는 시민이 되고 싶었다. 외출할 때마다 따로 장바구니용 에코백을 챙겼고, 일회용품 사용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한 달 여행 장소로 발리를 택한 건 자연스러운 바다를 보고 싶어서였다. 깨끗하고 파란 바다.
물론 아직까지 발리 바다는 아름답다. 천혜의 자연환경이란 이런 거구나 절로 감탄하게 된다. 동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을 누리려면 그만큼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자연은 그대로 있어주지 않을 테니까.
서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부엌 깊숙이 넣어둔 텀블러를 찾는 일이었다. 여행 몇 달이 지난 지금도 아이는 점토로, 레고로 이루미의 모습을 만든다. 지금쯤 날날이 동생 이루미는 발리 바다 어디쯤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