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제주한담

산천단에서 기원하기

by 홍난영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권은 제주도 편이다. 제주로 국수 여행을 오기 전에 이 책을 읽었고 유홍준 작가가 제주도에 올 때 늘 ‘산천단’에 들린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도 그러고 싶었다. 산천단은 조선 시대 관리가 제주에 오면 들려 무사 기원을 위해 제를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원래는 한라산 높은 곳에 있었는데 그곳을 오르는 중에 죽는 사람도 생기자 낮은 곳으로 옮긴 게 오늘날의 산천단이라고 한다.


첫 번째 제주 국수 여행의 첫날, 나는 산천단을 찾았다. 가기 전까지 뭔가 신령스러운 공간이 있을 것이라 상상을 했는데 막상 가보니 그냥 공원 같았다. 함께 갔던 제주민 K는 어렸을 때 그곳으로 소풍을 가기도 했다니 말 다했다. 하기사 내가 초등학생 때 소풍 갔던 곳은 ‘태릉’이었다. 태릉 하면 선수촌이 떠오르지만 사실 태릉은 ‘릉’으로 조선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윤 씨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DSC02166.JPG 산천단의 모습. 저 멀리 제단이 보인다


제주에 올 때 작은 향초를 준비해갔었다. 산천단 제단에 초를 켜고 무사를 기원할 참이었다. 그런데 저 멀리 제단이 보이긴 하는데 펜스가 쳐져 있어서 들어갈 수는 없었다. 나는 어쩌면 FM이다. 독한 FM은 아니지만 하지 말라면 어지간하면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답답해 보일 수도 있다. 산천단에 펜스가 쳐져 있으니 나로서는 들어가서는 안 될 곳이었다.


아쉬웠지만 산천단에 들렸다는 것을 위안 삼고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K가 나를 부추였다. '잠깐 초 켜도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먼저 펜스를 넘는다. 살짝 고민됐지만, 꼭 하고 싶었던 터라 나도 뒤따라 펜스를 넘었다.


주위를 살피고 떨리는 마음으로 초를 얼른 꺼내 불을 붙였다. 하지만 내 소심한 마음은 오래 견뎌주질 않았다. 초를 켜고 손을 모으고 ‘저 제주에 왔습니다. 돌아가는 그 날까지 잘 부탁드립니다.’ 빌고 곧바로 초를 후, 불어 껐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펜스를 넘어 빠져나왔다. 어쩌면 K는 그런 나를 보며 어이없어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넘어왔으면 제대로 하든가.


DSC02171.JPG 소심하게 켰던 소심한 향초


나는 늘 이렇다.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어떤 경계를 쳐두고 그 안에서 살아가려고 한다. 어쩌다 선을 넘더라도 두려워서 이내 돌아간다. 사람 관계엔 언제나 정치, 가볍게 말해서는 밀당이 존재하는데 그걸 못하기도 하거니와 하지 않으려 한다. 그걸 안 하려면 장인정신으로 뚝심 있게 자기 일을 밀고 나가기라도 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다. 그냥 나는 좁은 경계 안에서 숨어지내는 인간이다.


아, 그런데 무사 기원이라니. 넌 언제나 안전했잖아.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잖아.


산천단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길은 솔직히 좀 찹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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