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22일을 추억하며)
비가 올 듯 말 듯 한 날,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다. 우산을 가져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금방 돌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나섰다. 송악산 둘레길은 입구의 풍경부터 굉장히 예뻤다. 본격적으로 돌기 전부터 폭풍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그러다 내 앞 풍경에서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개피곤한 개 한 마리가 업혀 가고 있었다. 스스로 어떤 미동도 하지 않고 엄마의 걸음 진동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녀석의 표정은 심란했다. 적어도 ‘내가 왜 가야 하는가’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중인 듯했고 심하게는 삶까지도 포기한 것 같았다. 개가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둘 사이에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웃기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다.
개피곤한 녀석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한 송악산 둘레길은 그야말로 제주스러운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러다 송악산 분화구에 오르는 길까지 왔다. 주변 안내판엔 오르지 말라고 쓰여있었는데 몇몇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르고 있었다. 오르지 말라니 그냥 지나쳤는데 아무래도 너무 궁금한 거다. 분화구가 말이다.
화산의 분화구는 본 적이 없었다. 막연하게 산 정상이 움푹 패여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옛날 옛적에 용암이 뿜어져 나온 바로 그곳은 어떤 모습일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생까고 올라보기로 했다. 가끔 나도 생깐다. -.-v
저 멀리 가파도와 마라도가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가파도, 마라도를 가보지 않는 상황이라 그저 신기했다.
드디어 정상. 어쩐지 정상에서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이 멋져 보였다. 분화구는 내 생각과 달리 매끈했다. 웃기지만 난 분화구의 중심은 깊은 구멍이 뻥 뚫려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월이 흘러 그곳은 식물로 뒤덮여있었다. 1차원적인 상상을 한 내가 어리석었다.
정상에 오르고 분화구의 모습을 확인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보다 앞서가던 사람들이 어디로 내려갔는지 알 수 없었던 거다. 분명 내려가는 길이 있을 텐데 펜스가 쳐져 있다거나 해서 ‘내려가는 곳’임을 확인시켜주는 표식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못 봤을 수도 있다. 나는 이미 멘붕이었으니까.
그저 사람들의 발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좁은 길의 흔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곳이겠거니 하고 그냥 그쪽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내려갈수록 제대로 된 길이 나오지 않았다.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가 오후 5시쯤이었고 비는 계속 올 듯 말 듯 했다. 아, 이렇게 헤매다 날이 지고 비가 내리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건가. 다음날 신문에 ‘제주여행 온 홍 모 씨, 송악산에서 쓰러진 채 발견’이라고 실리는 건 아닌지.
송악산 입구에서 슬쩍 본 지도에서 송악산 둘레길은 동그라미 형태였으니 질러가면 맞은 편이 나올 것 같다는 불확실한 판단으로 그냥 계속 질러갔다. 나는 공감각 제로인데 방법이 없었다. 내 주변엔 사람도 없었다. 비만 오지 말라. 제발.
미친 듯이 헤매다 둘레길 펜스가 쳐져 있는 곳을 발견했다. 펜스만 넘으면 둘레길로 들어갈 수 있는 거다. 펜스로 넘어가는 ‘정상적인’ 길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분명 나는 이상한 길로 들어서 혼자 헤매고 있었던 거다.
다리도 짧은 나는 반가운 마음에 우격다짐으로 펜스를 넘었다. 마침 지나가던 아주머니들. 아~ 개피곤한 녀석을 만났을 때 내 옆에서 이야기하며 함께 걷던 분들이다. 완전 반가웠다. 오르지 말라던 분화구를 쌩까고 오른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민망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태연하게 둘레길을 마저 돌았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덧.
송악산 분화구로 오르는 길은 보호를 위해 현재 공식적으로 폐쇄(출입제한)되었다. 내가 올랐던 그 시기엔 폐쇄까지 되진 않았으나 보호 차원에서 안내문을 써넣고 있었던 것 같다. 2020년 7월 31일까지 복원을 위해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