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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Dec 25. 2015

23 선행학습

우리 아이는 선행학습을 해야 할까요?

  민재를 처음 본 것은 중학교 1학년 이었다. 공부를 가르쳐보니 잘하는 것도 아니고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는 하는 것 같지만 2%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교에서 A, B, C 수준별 이동수업을 할 때면 B반에 있는 정도였다. 운이 좋으면 A반에 살짝 걸쳐있기도 하다가 C반으로 미끄러지기도 하는 전국의 평균적인 아이였다.

  

  중3이 되자 어머니께서 '선행학습'을 시켜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아마도 이런 평범한 아이들의 대다수 부모님들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만약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면 선행학습을 시켜야 하나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라면 선행학습은커녕 지금 배우고 있는 거나 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과연 평범한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하면 좋을까? 결정을 하기 전에 먼저 선행학습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파악해보자. 선행학습의 가장 큰 장점은 동기부여이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새로운 것'을 좋아한다. 새 옷, 새 신발, 새로운 드라마, 새로운 영화, 심지어 새 책도 처음에 몇 장을 넘길 때면 기분이 좋다. 더군다나 선행은 새로운 것을 '남보다 앞서서' 간다는 우월의식도 심어주니 일석이조이다. 선행학습을 하면 아이들의 눈이 유독 반짝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동시에 존재한다.


  선행학습의 단점은 아이들이 거만해진다는 것이다. 남보다 먼저 배웠다는 자만심에, 학원에서 배운 것을 학교에서 또 하니깐 '흥 그거 다 알고 있는데' 하면서 학교 수업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학교 수업시간에 다른 공부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아이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확인해보면 잘 모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선행학습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또 다른 특징이 후행 학습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후행 학습은 배웠던 것을 다시 '복습'하는 것이다. 


  사실 선행학습보다 후행 학습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선행학습이 신선한 느낌을 주는 반면에, 후행 학습은 고리타분한 느낌을 준다. 배웠던 것을 복습하는 날에는 아이들의 표정도 극명하게 갈린다.


  최상위권 아이들은 담담한 표정으로 배웠던 것을 다시 학습한다.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처음 배울  때처럼 신중한 자세로 다시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재정리한다. '혹시 내가 하나라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나?'라는 표정을 가지고 선생님이 말하는 내용과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 사이의 간극을 계속 확인한다. 사실 똑같은 얘기를 여러 번 하면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이 더 신경이 쓰인다.


  「동규야. 너는 다 알고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열심히 듣냐?」

  「샘. 아닙니더. 알고 있는 것은 복습을 하는 거고 모르는 건 배우는 거지요. 괜찮습니다.」


  역시 상위권 아이들은  마인드부터가 다르다. 그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수업을 듣다가 머리에 불이 켜진다. '아하!'  며칠 동안 계속 꼬리에 꼬리를 물었던 의문이 풀렸다. 수업이 끝나고 성호가 입을 뗀다.


  「선생님. 그동안 관계대명사 하고 관계부사의 차이가 모호했는데 오늘 품사를 배울 때 대명사와 부사의 설명을 들으면서 드디어 모든 퍼즐이 맞춰진 것 같아요.」

  「그러냐? 열심히 해라~」


  중위권 아이들은 예전에 배웠던 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하겠다고 말하자마자 이런 반응이 나온다.


  「그거 했는데 또 해요?」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이 잘 알고 있나 확인을 해보면 십중팔구 엉망진창이다. 그래서 앞으로 공부를 하는데 이 파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일장연설을 해주고 꼭 알아야 하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설명하지만, 중위권 아이들은 엎드리고 벽에 기댄다. '지겨우니 빨리 끝내라'는 말을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은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애들이 하자는 대로 복습을 건너뛰면 그 아이들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고, 아이들이 듣고 있지 않는 상황에서 계속 수업을 하자니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가수는 청중들이 잘 들어줘야 있어야 노래 부를 맛이 나고, 선생은 학생들이 잘 들어줘야 가르치는 힘이 난다. 


  듣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처럼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 없다. 


  이미 배운 것을 정말 잘 알고 있는 아이들은 후행 학습도 진지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배운 것을 잘 모르는 아이들은 오로지 앞으로만 나가고 싶어 한다. 공부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하나 후행 학습을 하나 반응이 없다. 왜냐하면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외압에 이끌려 육체는 교실에 왔지만, 영혼은 게임, 드라마, 연예인 등과 같이 있기 때문이다. 좀비처럼 걸어 들어와서 끝나는 종이 치면 우사인 볼트처럼 뛰어나간다. 영혼이 있는 곳에 육체가 가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만난 아이들은 마치 접신을 한 것처럼 컴퓨터, TV, 휴대폰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공부도 부익부 빈익빈이 적용되는 것 같다.


  한 가지 더 기억해야 할 점은 공부는 단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관계라는 것이 생긴다. 그 관계에는 온갖 복잡한 변수가 작용한다. 그래서 우호적인 관계가 생기고 적대적인 관계도 생긴다. 예컨대 청소년기에 친한 친구가 같은 이성을 좋아하는 것처럼 비극적인 관계가 없다. 부모와 자식은 법적으로도 끊을 수 없는 피로 연결된 관계이다. 


  흥미로운 점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도 관계가 존재한다. 내가 칼을 소중히 다루면 칼은 나에게 원하는 부위를 깔끔하게  절단하게 해준다. 하지만 내가 칼을 하찮게 다루면 칼은 내 살을 베어버린다. '나를 그렇게 다루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이다. 사람과 과목 사이에도 관계가 존재한다. 내가 그 과목을 진지하고 애지중지하게 다루면 과목은 나에게 '성적'으로 보답을 해준다. 자기를 소중하게 보듬어 줬으므로 후하게 점수를 주는 것이다. 반면에 소중하지 않게 다루면 여지없이 딱 그 만큼의 점수만 허락해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인정이 있어서 봐주는 경우라도 있지만, 과목은 인정사정이 없다. 


  공부를 잘 하는 학생들은 과목을  신성시한다. 보고 또 봐도 신중한 태도를 견지한다. 공부를 어설프게 하는 학생들은 과목을 하찮게 여긴다. 대충 보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무시하는 태도를 보인다. 과목은 자기에게 쓴 에너지 만큼, 정확히 그 만큼만 돌려주는 것이다. 상위권과 중위권 아이들을 비교해보면 능력의 차이보다 이러한 태도의 차이가 더 크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인성적인 측면이 학업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겸손한 아이가 공부도 더 잘한다. 

  정리하면, 우리 아이는 선행학습을 해야 할까요? 상위권 아이들은 하면 된다. 중위권 아이들은 선생 학습보다 후행 학습이 먼저다. 물론 선행학습과 후행 학습을 병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후행 학습을 권한다.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 중에서 선행학습을 안 하는 아이는 있지만 후행 학습을 안 하는 아이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겨운 것을 참고 인내하는 인성적인 부분도 공부와 관련이 있다. 매사에 겸손한 태도를 견지한다면 설사 1등은 못하더라도 어디가 도 환영받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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