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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Jul 04. 2016

45 대한민국 사교육 이야기

내 아이 vs. 네 아이

  몇 년 전 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있는데 원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요지는 지금 우리 학원에 '높으신 분'의 자녀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수업시간에 하는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원래 수업은 학생의 수준보다 약간 높게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수업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학생들이 다 아는 것을 말하면 집중해서 듣지 않으니깐.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아이가 높으신 분의 자녀라는 것이었다. 


  원장님이 그 아이를 수업시간 외에 따로 좀 봐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질문이 아니라 '통보'였다. 사실 이런 경우는 없었다. 아이가 이해를 못해서 따로 과외를 해주다 보면 모든 아이를 다 봐줘야 한다.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봐주지 않으면 형평성에서 어긋나니깐. 그러나 높으신 분의 자녀는 예외였다. 더 흥미로웠던 것은 늘 교실이 부족해서 난리였는데 그 아이의 교실을 따로 정해서 선생님이 그리로 가서 아이를 봐주라는 것이었다. 뭐 이런 경우가 다 있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원장님이 이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만약 높으신 분에게 잘못 보이면 학원을 운영하는데 큰 지장을 겪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지점에 생각이 다다르자 이런 결론이 나왔다.


  나만 참으면 그만이다.


  한 번은 지인의 소개로 과외를 하게 되었다. 사실 대학생 이후로 과외는 웬만하면 하질 않았다. 남의 집에 신발 벗고 들어가서 어색하게 굽신거리는 게 어쩐지 사회의 '을'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 아까운 자리인데 본인이 외국에 유학을 가게 되어 부득이하게 소개해주는 것이라며 꼭 기회를 잡으라고 했다. 아이를 몇 번 가르쳐 보니 여느 집 과외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의 아버지가 고등학교 선생님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일반고가 아니라 '특성화고' 고3 담임 선생님이었다.


정부의 홈페이지에는 특성화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특정 분야의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학교로서, 학생 개개인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우수한 인재를 양성하고 좋은 일자리에 취업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학교이다.

계열별로 분류하면 전국에 공업-247개, 농업 51개, 상업 246개의 학교에서 약 33만 3천 명의 학생이 있다.


  특성화고는  만화와 애니메이션, 요리, 영상 제작, 관광, 통역, 금은보석 세공, 인터넷, 멀티미디어, 원예, 골프, 공예, 디자인, 도예, 승마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과 소질이 있는 학생들에게 맡는 교육을 실시하는 학교로 이해하면 된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교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있고 취업을 하는 학생도 있다. 그런데 '진학률'이 아닌 '취업률'이 학교 평가의 기준이기 때문에 특성화고 고3 담임선생님들은 아이에게 취업을 권하는 것이 현실이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취업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사회가 하는 차별을 평생 참아 내기만 하면 말이다. 과외를 소개해 준 지인이 유학을 떠나기 전에 만날 기회가 있었다.


「너 알고 있었지?」

「뭐를?」

「아이 아버지가 특성화고 고3 담임 선생님인 거.」

「어. 그게 왜?」

「아니, 좀 그렇잖아...」

「뭐가?」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취업시키고 본인 자녀는 대학교 보내려고 과외를 시키고...」

「뭐 어때. 다 그러는 거지 뭐. 너는 돈만 많이 받으면 되지 뭐 그런 걸 신경 써?」

「그런가?...」

「암튼 나는 능력을 인정받아서 교감, 교장 선생님 애들까지 가르쳤다. 너도 열심히 해서 재미 좀 봐!」

「.....」


  이번에도 나만 신경 쓰지 않으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잠정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라도 자식 문제만큼은 권력이든 자본이든 도덕적으로 옳지 않더라도 내 자식이 우위에 설 수 있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러니 문제는 내 아이가 받는 사교육이 아니라 네 아이가 받는 사교육인 것이다. 혹시 이런 사람을 비난하라면 마음이 든다면 생각을 잠시 멈춰보자. 그리고 이렇게 질문해보자.


'만약 내가 그 입장에 있으면 다르게 행동할 것인가?'


  다들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타인을 쉽게 손가락질 하지만, 입장이 바뀌면 생각도 달라지는 법이다. 누구라도 그런 자리에 있으면 비슷하게 행동할 수 있다. 사람일은 모르는 것이다. 노조 위원장이 사장으로 승격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노조를 해체하는 것이니깐. 


  사교육과 관련해서 얼마 전에 이재정 경기도 교육감이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의 핵심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아이를 학원에 절대로 보내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상상하게 해야 합니다. 아이를 학원에 보내는 게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길이 될 겁니다. 아이들이 자기 시간을 자기가 계획해 쓰게 해야 합니다.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이고 이런 교육이 이뤄져야 한국은 선진국이 될 겁니다.”


  그리고 기사의 댓글을 읽어보았다. 매우 다양하고 거친(?) 의견들이 많았다. 이 기사에 달린 댓글을 한 마디로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좋은 말인데 현실이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


  당장에 성적이 떨어지면 그 아이가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너무나 큰 우리 현실에서 학원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의 모임에서도 주제가 '사교육을 시켜야 하는가?'가 아니다. '어떤 사교육을 시켜야 효과가 있을까?'이다. 실제로 10명의 부모님을 만나면 8~9명 정도는 현재 아이의 상황에 맞는 사교육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는 경우가 많다. 과외를 해야 하는지, 아이가 기초가 부족한데 어떤 학원에 보내야 하는지,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혼자 공부한다고 하는데 밑고 맡겨도 되는지 등이다. 이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한 번쯤은 공론화를 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정리하면, 우리는 늘 사교육이 문제라고 말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사교육 자체가 문제라기보다는 남의 집 아이가, 있는 집 자식들이 받는 사교육이 문제라는 것이다. 입시 전형이 어떻게 변하든지 사교육은 이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내 아이가 잘 되길 바라는 부모들은 아이를 사교육에 울며 겨자먹기로 보낼 수밖에 없다. 다 사교육을 받는 상황에서 내 아이만 사교육을 받지 않으면 무책임한 부모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 학부모들의 관심은 자녀에게 사교육을 시킬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다. 어떤 사교육을 어떻게 이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는지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다음 글에서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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