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선택은?
1989년 마이크로 소프트는 세계 최대 최고의 백과사전을 만들겠다는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당시 마이크로 소프트는 MS-DOS에 이어 MS-WINDOWS라는 OS로 전 세계를 마이크로 소프트의 노예(?)로 만들던 시기였다. 초대형 글로벌 기업이 천문학적인 액수와 전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의 투입되었다. 방대한 양의 백과사전을 한 장의 CD에 담아 팔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1993년 3월 드디어 MS사의 프로젝트가 세상에 공개되었다. 정식 명칭은 '마이크로소프트 엔카르타 멀티미디어 백과사전'으로 당시 가격은 약 40만 원이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판매가 저조했다. 내용도 보강하고 가격 인하도 시도했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1998년에 온라인에서 이용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만들면서 최후의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지금은 웹사이트에서 무언가를 검색하는 것이 일상이지만 당시만 해도 획기전인 일이었다.) 결국 2000년부터 무료로 공개하면서 구겨진 체면을 살리지 못했다. 마침내 2009년 10월 MS사는 15년이 넘게 이끌어오던 엔카르타의 모든 서비스를 중단했다.
2001년 1월 15일에 지미 웨일스와 래리 생어가 공동으로 세운 비영리 단체인 위키미디어 재단에서 '위키피디아'를 시작했다. 누구나 내용을 고칠 수 있으며, 모든 정보를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쓸 수 있다. 위키피디아는 처음 시작한 지 8년 만에 200개가 넘는 언어로 사용되는 세계 최대 규모의 가장 인기 있는 백과사전으로 급부상했다. 세계 최고의 전문가들과 세계 최대의 자본이 만들어낸 제품이 평범한 일반인들이 만든 제품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이 왔음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변화하는 흐름의 핵심을 한 마디로 설명하는 용어는 '집단지성'이다.
집단지성(集團知性, 영어: collective intelligence)이란 다수의 개체들이 서로 협력 혹은 경쟁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결과이다. 쉽게 말해서 집단적 능력을 말한다. 소수의 우수한 개체나 전문가의 능력보다 다양성과 독립성을 가진 집단의 통합된 지성이 올바른 결론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from 위키피디아
더 이상 새로운 아이디어와 기술은 천재 한 명이 지하실에서 고독하게 만들어내지 않는다. 오늘날 획기적인 물건들은 연구실에서 여러 명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면서 개발한다. 나아가 전 세계 학자와 연구자들이 논문으로 학문적 교류를 하면서 다양한 생각들을 발전시킨다. 집단지성을 쉽게 이해하면 결국 '백지장도 맞들면 낮다.'는 의미이다. 똑똑한 한 명의 사람보다 평범한 다수가 더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고민한 사람의 생각은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요즘은 전문가라고 해서 그의 생각을 무조건 믿고 따라가는 시대가 아니다. 전문가들도 비전문가들에게서 많은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는다. 한 때 미국 드라마 <하우스>를 즐겨 보았다. 주인공 하우스 박사는 실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은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그런 그의 비범함(?)은 직원을 고용할 때도 여실이 드러났다. 면접에서 본인이 한 의견을 제시한다. 그리고 면접자들의 생각을 묻는다. 물론 하우스 박사보다 경험과 실력이 부족하니 면접자들은 하우스의 의견에 동조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할 말이 없다.
「박사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환자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매우 훌륭한 고견이십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하우스 박사는 이런 사람들을 절대로 고용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을 고용했다.
「박사님 의견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무슨 문제?」
「글쎄.. 그건 좀 더 자료를 찾아봐야겠지만, 아무튼 뭔가... 느낌이...」
「자네는 지금 구체적인 근거도 없이 내 의견에 반대하는 것인가?」
「아, 네. 환자의 증상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유발될 수 있는데 그 모든 가능성을 배제할 수...」
「그런 식으로 하면 한 환자마다 수 백 가지의 테스트를 해야 하는데 그 비용은 자네가 감당할 텐가?」
「그런 뜻이 아니라, 만약을 위해서..」
「자네 지금 나의 판단을 믿지 못하는 건가?」
그는 무조건 본인의 의견에 반대하는 지원자들만 골랐다. 지원자들의 의견이 논리적인지, 비판이 타당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본인의 의견에 반대한다는 것, 그것이 채용의 결정적인 기준이었다. 왜 항상 그런 사람들만 뽑냐는 주변 사람들의 질문에 하우스는 상대방이 반론을 제기하면 일단 감정이 상하고 말싸움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미처 놓친 증상이나 생각하지 못한 원인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본인의 생각에 누군가가 반대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임을 터득했다고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의 반박에 대답하기 위해서 다시 한번 더 근거를 찾고 머릿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지식에 불이 켜지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만약 본인이 한 말에 대해서 상대방이 맞장구만 치면 생각은 더 이상 발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반대하면 기분이 상하고 때로는 화가 나기도 하지만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그 과정은 꼭 거쳐야 하는 것이란다. 그래서 어설픈 초짜 의사들이 본인의 의견에 토를 달면 속이 뒤틀리지만(하우스는 성격이 괴팍하다), 그 사람을 채용한다는 것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본인의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지금 우리나라 입시 정책은 전문가들이 정한다. 수능이 처음 도입되었을 때도, 논술을 시작했을 때도, 입학사정관제도를 들여올 때도 일반 국민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앞으로 어떤 제도가 시행되는지 뉴스를 통해서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정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위해서 부랴부랴 이 학원 저 학원의 설명회를 따라다녔다. 입시학원, 논술학원, 컨설팅 학원 등의 설명회는 신기하게도 기승전-우리 학원에 다니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2018년에도 입시의 큰 방향이 수시를 늘리고 정시를 줄이는 것으로 발표되었다. 역시나 전문가들이 결정한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정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의사결정 방식이 항상 최적의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 <국민 투표> 앱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중대한 사안에 대해서 국민들의 생각을 직접 묻는 것이다. 스마트폰 보급률 세계 1위인(91%) 만큼 물리적인 인프라는 갖추어져 있다. 몇몇 바쁜 사람에게 전화해서 어떤 정당을 지지하느냐, 어떤 정책을 좋아하느냐 이런 질문을 하는 것도 시대착오적인 방법이다. 각 정책의 장단점을 잘 설명한 후에 국민들이 어떤 입시정책을 지지하는지 앱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앱은 평범한 프로그래머 1명이 1일이면 만들 수 있다.
당신은 어떤 대입 전형을 지지하십니까?
학생부 교과
장점 : 내신 점수라는 개관적 기준이 있다. 수능 한 번이 아니라 3년 동안의 공부로 판단한다.
단점 : 매 시험이 대입과 직결되므로 옆 친구와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한다. 뒤늦게 마음먹고 공부를 시작한 학생의 역전 가능성이 희박하다. 경제적 차이가 사교육의 차이로 이어진다. 심화반을 운영해서 성적이 높은 아이들만 따로 관리를 받는다. 학교마다 시험 문제의 수준이 다르므로 형평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학생부 종합
장점 : 학생 개개인의 적성과 소질에 맞는 진로 설정을 장려한다.
단점 : 진로, 독서, 봉사, 동아리 활동을 관리해 주는 학원이 생긴다. 경제적 차이가 사교육의 차이로 이어진다. 평가 시 입학 사정관의 주관적 요소가 들어간다. 교내 수상 실적을 특정 학생에게 몰아주는 경향이 있다. 학교와 담임 선생님처럼 개인의 노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요소가 입시에 영향을 미친다.
논술
장점 :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깊이 있는 사고를 배울 수 있다. 글쓰기의 표현력과 논리력을 훈련할 수 있다.
단점 : 논술은 개별 첨삭이 병행되어야 하는데 이는 공교육에서 소화할 수 없다. 평가에 채점자의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있다.
지역균형 선발/기회균등 선발
장점 : 지역, 개인마다 다른 교육적 환경을 고려해서 가능성이 있는 학생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
단점 : 역차별 논란이 존재한다. 합격해도 또래들 사이에서 차별이 존재한다.
수능
장점 : 수능 점수라는 객관적 기준이 있다.
단점 : 획일화된 주입식 공부를 조장한다. 부모의 경제적 차이가 사교육의 차이로 이어진다. 단 한 번의 시험으로 모든 것을 평가한다. 수준별 반 편성을 통해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에게 물심양면의 지원이 쏠린다.
이렇게 각 정책에 따른 장단점을 자세하게 알려주고 과연 국민들의 생각이 어떤지 확인해 봤으면 좋겠다. 혹은 새로운 대안이 전문가가 아니라 평범한 시민들의 머릿속에서 나올 수도 있다. 어쨌든 만약 정부의 교육 방향과 일맥상통한 결과가 나오면 정부의 정책은 국민들이 지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교육 방향과 다른 결과가 나온다면 정부는 고민해 볼 수 있다. 국민들의 생각을 반영할지, 아니면 국민들을 설득할지. 지금은 문제가 많지만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이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물론 이 과정에서 충돌과 갈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갈등은 필요악이다. 닥터 하우스가 본인의 의견에 반대하는 동료만 뽑았듯이. 물론 지금의 교육 정책 결정권자들은 국민들을 동물로 보기 때문에 이런 수고스러운 일을 생각하지 않겠지만...
정리하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21세기에서도 대한민국 정부는 오래전 그 방식 그대로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 전문가가 정하고 국민들이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라고 해서 상항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해당 분야에서 오래 있다 보면 관점이 한쪽으로 치우쳐질 수 있다. 그래서 균형 잡힌 관점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게 여러 국민들의 뜻을 확인해가면서 입시정책을 결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전 국민이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니다. 다만 권력자들의 단호한 의지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국민들의 생각이 정부의 방향과 다르게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난처한 상황을 고위 공무원들은 굳이 경험하고 싶지 않겠지만,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선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