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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석철 Nov 01. 2015

17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

아이가 지금도 행복하고 나중에도 행복하길 바란다면?

  대학생일 때 숙제도 많이 내 주고 엄하게 가르치는 교수님은 그 당시에는 싫다. 친구들끼리 그 지독함을 빗대서 '독사'라느니 '악마'라느니 부르곤 했다. 그런데 사회에 나가서 취직을 하고 어찌어찌 일을 하다 보면 매일매일이 경쟁의 연속이다. 남의 돈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없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옛날에 그 미웠던 '독사'와 '악마' 덕분에 내가 조금이나마 발전한 것 같아서 교수님에게 뒤늦게나마 고마운 마음이 생긴다. 


  반면에 출석만 잘 하면 A를 주겠다고 거래?를 한 교수님은 그 당시에는 인기 최고다. 강의 신청을  시작한 지 1분 만에 마감이 되어 버린다. 수업시간도 잘 안 지켜서 3시간 수업인데 늘 2시간만 하고 끝냈다. 그러나 그렇게 편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어쨌든 졸업을 하고 사회에 나가야 한다. 이력서를 쓸 때부터 불안하다. 얼마나 공부를 안 했는지 본인이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회사에 취직하고 어찌어찌 버텨나가고는 있지만 동기들 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불길한 예감은 늘 적중한다. 이번 승진심사에도 또 내 이름이 없다. 달력을 보니 5월 15일 스승의 날이다. 예전에 출석만 해도 A를 준다던 '그 인간'은 잘 살고 있으려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쪽은 교수님이고 다른  한쪽은 그 인간 이유로 기억된다.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하면 함께 했던 모든 시간이 부정된다.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모든 아이들은 공부를 하기 싫어한다. 왜냐하면 힘들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공부는 힘이 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힘이 들어야만 공부가 된다. 공부는 미래를 바꾸는 과정인데 미래가 쉽게 바뀔 리가 없다. 대부분 적당히 타협하고 본인이 꿈꾸는 삶을 현실로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리고 본인이 못다 이룬 꿈을 자식이 이루어주길 기대한다. 그러나 어른들이 어릴 때 그랬듯이 지금의 아이들도 공부하기를 저항한다. 그나마 어릴 때는 솔직하게 나온다.


「엄마. 나 공부하기 싫어. 재미없어.」

「하기 싫어도   참고해야 돼.」

「왜?」

「사람은 누구나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러다 나이가 들면 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공부하라고 그러면 밥 안 먹을 거야!」


  처음에는 힘들게 얻어서 애지중지하는 아이가 밥을 굶고 있으니 속수무책이다. 그런데 굶으면 본인만 손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깨닫는다. 이것도 몇 번 사용하다 보면 약발이 떨어진다. 이러한 약한 협박에 내성이 생긴 부모님에게 좀 더 강력한 방법을 쓴다. 


「공부하라고 그러면 집 나갈 거야!」


  부모님은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다. 매일 뉴스에 가출한 애들끼리 모여서 '가출팸'을 만들고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보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가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친다. 몇몇 용감한 아이들은 협박을 실천함으로써 빈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왜 있는지 아이들은 밖에 나가 보고 알게 된다. 드디어 아이들은 최후통첩을 한다.


「공부하라고 그러면 나 죽을 거야!」


  부모님은 "흥. 마음대로 해봐."라고 콧방귀를 끼지만 뉴스에서 '대한민국의 청소년 자살'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등골이 싸늘해진다. 일 년에 몇 만 명의 청소년들이 자살한다는 통계를 보고 웃어 넘길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도 어릴 적에 이렇게 얘기했던 적이 있다. 역시 대부분의 아이들이 생각하는 것은 다 비슷한 것 같다.


「이렇게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느니 그냥 콱 죽어버릴 거야.」


  이에 대한 우리 아버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그런 정신 상태로는 사회에 나가 봤자 어차피 지 밥벌이도 못할 테니 미리 죽는 게 낫다.」

「.....」


  자식이 죽는다고 해도 꿈쩍 않는 아버지를 둔 덕분? 에 나는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아이들은 갖은 수를 쓰더라도 공부를 회피하고 싶어 한다. 머리가 큰 아이들은 솔직하게 공부가 하기 싫다고 말하는 대신 논리적으로 피해 가는 방법을 선택한다.


「저 선생님 이상한 거 같아.」

「이 학원은 나랑 안 맞는 거 같아.」

「이 책은 설명이 어렵게 되어 있어서 이해가 안가.」

「애들이 시끄러워서 공부를 할 수가 없어.」

「다 알고 있는 것만 가르치는 것 같아.」


  이 말을 그대로 믿는 어른들이 꽤나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으로 공부 안 하는 아이들은 저 책으로도 안 한다. 애들이 시끄러워서 공부를 못 한다는 아이를 조용한 독서실에 앉혀놓으면  틀림없이 잠을 잘 것이다. 다 알고 있는 것만 가르친다고 불평하는 아이를 다른 수업을 듣게 하면 하나도 모르는 것만 가르친다고 불평할 것이다. 결국 이 말은 '공부가 하기 싫어요.'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고1 승구는 늘 지각을 한다. 10분, 20분은 기본이고 30분, 한 시간씩 늦을 때도 허다하다.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핑계 때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선생님... 오, 오늘은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어요...」

「뭔데? 들어나 보자.」

「불닭 먹다가 옷에 묻어서 갈아입고 오느라....」


  며칠 뒤에는 교복 바지가 터져서 갈아입고 오느라 늦었다고 했다. 이 역시도 정말로 어쩔 수가 없었다고 침을 튀기며 흥분하며 말했다.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한 시간이나 늦었다. 이번에 준비한 핑계는 다음과 같았다.


「아.. 선생님.. 오늘은 진짜 일찍 오려고 했는데요... 나갔더니 너무 추워서 다시 들어가서 옷을 더 입고... 나갔더니 아직도 추워서 다시 들어가서... 그렇게 한 겹 한 겹  입다가... 예... 어쩔 수 없이...」


  이는 정말로 추워서 옷 때문에 늦은 게 아니다. 공부가 하기 싫으니깐 늦게 온 것이다. (만약에 학원에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으면 추위를 견뎌내며 시간 보다 먼저 달려왔을 것이다.)


  고통 총량 불변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할 고통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쏟아지는 졸음을 참아가며 코피를 쏟고 공부한 아이들은 나중에 좀 편안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미 인생에서 겪어야 할 고통의 대부분을 10대에 미리 앞당겨 해결한 것이다. 매를 먼저 맞은 것이다. 주변에 성공한 전문직 종사자, 기업 간부, 고위직 공무원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른 친구들은 재미있게 놀고, 외모에 치장하고, 이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매일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면서 고독하게 공부를 했던 아이들이다. 학생 때는 지질하다고 놀림을 받던 아이들이 나중에서야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들이 모두 다 공부를 잘했던 것은 아니다. 공부는 썩 잘하지 못 했지만 대신에 본인이 일하는 분야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았던 경우도 있다. 남들 다 놀러 가거나 쉬는 휴일에 어떻게 하면 설득력 있는 제안서를 만들까 궁리하고, 회사의 제품에 대해서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거래처를 하나라도 더 뚫을 수 있을까 전국에 발품을 팔면서 여가 시간을 투자했다. 이렇게 2~30대를 눈물을 머금고 성실하게 보냈기 때문에 자신의 분야에서 인정을 받고 남들보다 좀 더 여유롭게 살 수 있는 것이다.


  반면에 학창시절에 친구들과 신나게 놀면서 어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것만 골라서 하면 그 당시에는 살맛이 난다. 전문 용어로 ‘일진’이다. 괴롭고 숨 막히는 단체 기합시간에 의자를 발로 걷어차고 일어나서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악당(학생주임 선생님)에게 저벅저벅 걸어가서 큰 소리로 한 마디 하고 가방을 터프하게 매고 머리를 휘날리며 학교를 박차고 나가는 일진을 보며 아이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아이들 세계에서 일진은 전교 1등보다 높은 계급이다. 계급이 올라가는 원리는 게임이나 현실이나 똑같다. 남들이 상대할 수 없는 몬스터(마음에 안 드는 어른들)를 처치하면 되는 것이다. 담배, 오토바이, 문신 이런 것들이 어른들이 보기에는 인생을 망치는 끔찍한 행위이지만 아이들 사이에서는 일진만이 할 수 있는 훈장 같은 것이다. 이들은 고3 졸업과 동시에 일진의 명예가 끝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싫지만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다. 그래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화려한 삶을 즐기기 위해서 밤마다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오토바이로 도심을 질주하는 세리머니를 펼친다. 이들은 인생의 즐거움을 미리 앞당겨 쓴 것이다. 그래서 남은 인생은 가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남들이 힘들게 자기 능력을 계발하는 동안에 즐겁게 놀았기 때문이다. 별다른 능력이 없으니 사회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될지는 뻔한 것이다. 이런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이렇게 말할까?


「지금은 힘들지만. 어릴 때는 자유롭게 놀게 해줘서 감사합니다.」


  아니면 이렇게 말할까?


「도대체 나한테 해 준 게 뭐가 있어요?!」


  지금 힘들게 공부하는 아이는 나중에  다른 사람들보다 잘 살 것이다. 비록 공부로는 성공을 못할 수도 있지만 공부를 통해 몸에 인내심과 성실함이 쌓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게 맞는 것인가 확신이 없어서 흔들릴 때 본인을 잡아주었던 부모님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한쪽은 부모님으로, 다른  한쪽은 나한테 해준 게 없는 사람으로 기억된다. 


  정리하면, 아이가 지금도 행복하고 나중에도 행복하길 바란다면? 그 꿈은 빨리 깨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좋은 행복한 삶은 없기 때문이다. 일부러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지만 현실을 직시할 필요는 있다.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누구나 비슷하다. 이를 학창시절에 먼저 겪을지, 대학생과 사회 초년생 시절에 겪을지, 중년 이후에 겪을지는 본인의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스스로 선택한 삶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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