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준일은 꽤 총명했다. 수업시간에는 예리한 질문으로 선생님을 놀라게 하는 영특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대통령, 과학자, 작가 등 다양한 꿈을 펼치며 미래를 낙관했다. 자신의 천재성에 노력이 더해지면 어떤 일이든 가능할 것만 같았다.
어느덧 청소년기에 들어선 준일이었다. 중학교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고등학교 공부와 크게 연관이 없다고 들었기에 공부는 뒷전이었다. 친구들과의 추억이 그에게는 더 중요했다. 그렇게 뜨거운 우정을 남기고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첫 시험을 치렀다.
중학교 때 수업 내용을 아예 몰랐던 그는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게 힘에 부쳤고 이는 성적에 그대로 나타났다. 꽤 충격이었지만 처음부터 정시가 목표였던 그는 바로 수능공부를 시작했다. 어차피 3학년까지는 2년이 남았기에 2학년 때까지는 적당히 개념만 공부해도 충분할 듯했다. 서울대가 목표였던 그는 3학년이 되자 성적에 맞는 4년제 학교라도 가겠다는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수능 준비를 시작했다.
서울대를 가는 사람은 몇 되지도 않는 '비정상'인 사람들일 뿐이다. 자신은 대학교에 가서 자신의 길을 찾아 서울대에 간 공붓벌레들보다 더 성공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자신을 믿어주는 부모님, 조금만 공부해도 남들보다 성적이 잘 나왔던 그의 좋은 머리, 어렸을 적부터 돋보였던 여러 재능들은 그를 날게 해 줄 날개가 될 것이었다. 그는 남은 1년간 꽤 치열하게 공부했다. 2학년까지 놀기만 했던 탓에 위기감이 그의 등을 떠미는 것만 같았기에 반강제적으로 공부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공부머리가 좋았던 준일은 적은 공부량에도 경기권의 4년제 학교에 합격했다. 친구들과 놀면서도 어떻게든 괜찮은 학교에 들어간 자신이 꽤 멋있다고 느껴졌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말하신 것처럼 대학교에서는 맘껏 청춘을 즐겨야 했기에 1학년 동안은 노는 것에 전념했다. 대학교 내 인맥은 매우 중요하다고 들은 기억이 있었던 그였다.
고등학교 때는 쓸데없는 것으로만 여겨졌던 유흥이 지금은 미래에 도움이 될 무기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였다. '출튀'는 그의 낭만이었고 D학점은 그의 훈장이었다. 1학년의 낮은 학점은 그가 학교생활을 성실히 했다는 지표인 것 같았다. 성적이야 군 전역 후 신경 쓰면 될 일이었다. 사람들이 군대 갔다 오면 다 정신 차린다고 하기에, 조금만 공부해도 좋은 성적을 얻을 자신이 있었기에 준일은 불안하지 않았다.
군전역 후 복학한 준일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좋은 성적을 내며 성실한 학생으로 돌변했다. 복학 후 첫 학기의 중간고사에서 모든 과목 만점을 차지한 준일이었다. 그러나 자신과 함께 한 친구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그였기에 중간고사 이후 친구들과의 만남에도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그의 성적은 천천히 하향곡선을 그렸고 마지막 학기에는 1학년 때의 낮은 학점으로 회귀했다.
어느덧 졸업을 앞둔 준일은 자신의 성적으로 갈 수 있는 회사가 거의 없음을 알고 절망했다. 그때서야 그는 대외활동, 공모전 등 취업 준비에 몰두했다. 좋은 머리 때문인지 여러 활동들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직원의 의견이 묵살되는 보수적인 문화, 일상이 된 야근에 연차 내기도 눈치 보이는 말 그대로 비전이 없는 기업이었지만 그런대로 생활할 수 있는 돈을 준다는 것에 위안을 얻고 언젠가는 대기업에서 빛나는 원석인 자신을 스카우트 해갈 것임을 믿고 있었던 준일은 묵묵히 회사에 출근했다.
어느덧 30대가 된 준일은 가끔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청춘 영화에 나온 주인공처럼 큰 꿈을 품었지만 그에 걸맞은 치열한 삶은 질색했던 그였다. 대통령, 과학자, 작가처럼 장대한 꿈을 이루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릿속에 남았다. 10대 때도, 20대에도, 지금마저도 노력하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는 놀면서도 나쁘지 않은 성적을 늘 유지하는 자신에게 심취했다. 현실은 영화처럼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음을 여러 매체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한 그였다. 죽을 듯이 노력해도 목표를 이루지 못하는 꼴사나운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는 '행운아'들을 시기하는 식으로 자신을 달랬다. 꽉 끼는 바지 주머니에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온 지갑처럼 노력 없이도 재능이 터져 나오려 하는 이들이 싫었다. 부자인 부모님 아래서 하고 싶은 일만 하는 2세들도 있다. 그들은 자신의 위치를 직접 쟁취한 업적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준일이 그들이었다면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어린 나이에 분에 넘치는 인기를 얻은 연예인들은 어떤가. 연예인들이 강남의 빌딩을 샀다는 등의 뉴스를 볼 때마다 그의 신념은 딱딱하게 굳어져 갔다. 부모님을 잘 만나서, 운 좋게 재능을 얻어서 떵떵거리고 사는 그들을 위한 불합리한 사회에서 꾸역꾸역 노력해 앞가림 가능할 정도의 돈을 버는 자신이 대견할 뿐이었다.
준일은 그가 혐오했던 꿈 없고 비관적인 아저씨가 되어가는 자신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영재였던 그의 모습을 남들에게 과시하듯 꺼내든다. 여러 현실적 제약으로 어쩔 수 없이 이 회사에서 썩고 있는 자신이지만 정상적인 환경이었다면 어디까지 날아오를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푸념을 침이 튀기도록 외치며 자신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