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단편집

내 아픔 아시는 당신께

특이한 사랑2

by 홍준오

떠나지 않겠다던 무모한 으름장을 놓은 나는 며칠 뒤 이별을 말했다.

넌 눈물 대신 덤덤한 순응을 택했다.


눈물은 되려 내 쪽에서 나왔다. 가장 힘든 널, 가장 무서울 널, 두고 돌아섰다. 그런데도 눈물은 내 쪽에서 나왔다. 이럴 거면 네 암소식을 들었을 때 짜증이라도 내지 말 걸 그랬다.


난 네게 모진 말만 남긴 채, 얼마 안 가 떠난 그저 그런 쓰레기였다. 그런 내가 뭐가 좋다고 마지막까지 욕 한마디 안 했는지.


이렇게 떠난다는데 밉지도 않아? 너 정말 내가 떠나도 괜찮아?


응, 괜찮아. 항암치료에 기운을 잃어가면, 머리카락이 다 달아나면, 그리고 언젠가 죽음이 내 눈앞에 닥치면, 내게 가장 소중한 널 저주하고 시샘할 거야. 술과 담배를 즐기는 너를, 밤이면 기름진 야식을 습관처럼 먹어치우는 너를, 그럼에도 나는 이곳 병상에, 넌 포근하고 아늑한 네 침대에 있는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할 거야. 2년이 걸려 헤어지던, 지금 헤어지던 이별은 이별이야. 지금 헤어지는 쪽이 서로에게 더 편할 것 같아.


(이때부터 눈물이 나왔다) 널 정말 사랑해. 하지만 내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어. 가장 힘들 네게 상처를 얹고 싶진 않았지만... 미안해.


얼마 안 되는 기간 동안 네 투병생활을 함께 하며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에 나오는 비극적인 사랑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하나가 걸렸다. 그 비련의 인물이 되기 위해선 너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하고 다른 이를 만나지 않아야 했다. 자신이 없었다. 너와 사귀는 동안에도 예쁜 사람을 보면 자연스레 시선이 갔고, 날 좋아했던 귀여운 후배에게 설레기도 했다. 내가 정말 널 진심으로 사랑한 걸까? 그렇다면 이런 자질구레한 생각은 뒤로 한 채 네 건강만 신경 쓰지 않았을까? 그게 너와의 이별을 결심한 이유가 되었다.


널 떠나고 보통의 생활로 돌아왔다. 밤이 되면 너와의 기억을 떠올렸다. 우린 각자의 삶을 존중했다. 집착이 있던 나였지만 너와는 달랐다. 넌 남자 문제로 내 속을 시끄럽게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너와의 만남은 특별하지 않았다. 어떤 날은 네 집 앞의 부대찌개 집에서, 어떤 날은 기껏 서울에 가 한강에서 걷기만 했다.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어색한 공백을 견디지 못하는 나였지만 너와는 달랐다.


각자의 생각에 잠겨 걷던 중 넌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기쁘지 않았다. 가슴이 쿵쾅거리고 손에 땀이 맺히지도 않았다. 대신 포근한 솜이 내 폐를 가득 채운 듯 편했다. 나도 말했다. 사랑한다고 말했다. 네 고백에 대답하려 어찌어찌 뱉어낸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정말 그랬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모든 게 사랑이었다. 음식부터, 영화, 음악까지 모두 다 상반된 취향이었던 너와 내가 어느새 같은 영화를 즐기고, 같은 음악에 감탄하며, 같은 식당을 공유한 건 사랑이다. 걸음이 빠른 내가 너와 걸을 때는 보폭을 줄이는 것도, 네가 걸음을 맞추기 위해 바삐 발을 옮기는 것도 사랑이다. 싸울 때마다 자리를 피하기만 하는 내가 너와는 바닥까지 내보이며 싸우는 것 또한 사랑이다. 네 아버지의 기일이 돌아오면 늘 함께 납골당에 가는 것, 사랑이다. 그런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날 바라보는 너, 사랑하고 있었다.


너와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건, 언제나 함께 할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결혼으로 내 곁에 있을 것을 약속하지 않아도, 10년, 20년 후에도 너와 싸우고 정처 없이 걷고, 우리끼리만 아는 농담에 깔깔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의 암 소식을 듣고 짜증부터 낸 건, 무서워서였다. 무의식 중 너와 미래를 그렸던 나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너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서였다.


네게 이별을 말한 다음 날, 난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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