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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대한 다원 녹차밭

by 레드산


4월 초는 계절적으로 애매하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차가운 기운이 많이 빠져있어 시들하고, 봄이라고 하기에는 아직 싸늘함이 남아 있어 봄이라고 하기가 뭐하다. 게다가 날씨는 변덕스럽게 수시로 오락가락한다. 계절의 자리를 두고 겨울과 봄이 틈만 나면 니 자리니 내 자리니 하면서 티격태격한다. 그래도 분명한 건 겨우내 숨죽이고 있던 삼라만상의 생명체들이 기지개를 켰다는 것이다.

따뜻한 남쪽 지방 보성을 가면서 잔뜩 봄을 기대했다. 사람들은 보성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떠올릴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긴 하겠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녹차를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보성을 여행한 사람치고 녹차밭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지 않을까 싶다. 보성 여행에서 녹차밭을 보지 않았다면 팥소 없는 붕어빵을 먹는 것처럼 밋밋했을 것이다.


지금까지 보성을 두 번 가봤다. 그때마다 녹차밭에 갔으니까, 이번이 세 번째다. 여행 욕심이 많아 어디를 가면 가보지 않은 곳을 찾으려고 한다. 그런데도 보성에 갈 때는 당연히 가야 할 곳으로 여겨 녹차밭을 또 찾는다. 가본 곳을 다시 찾을 때는 설레는 기대감보다 다시 만나는 정겨움과 반가움이 클 수밖에 없다.


보성 녹차밭에 가면 가장 먼저 다원 입구의 가로수길이 기분을 좋게 해준다. 이 가로수길은 마치 주요리가 나오기 전에 먹는 애피타이저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늘을 찌를 듯이 쭉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가 줄지어 선 가로수길은 걸을 때마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그 멋진 삼나무 가로수길을 걸으면 많은 시간을 들여 보성을 찾은 수고에 대해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또 그만큼 녹차밭에 대한 기대와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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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보성 녹차밭이라고 부르는 곳의 정확한 이름은 대한 다원 녹차밭이다. 1939년에 개원한 국내 최대의 다원으로 50여만 평의 차밭에서 580여만 그루의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산기슭에 조성된 차밭을 보면 먼저 그 규모에 입이 벌어진다. 또 산 아랫부분에서부터 시작해 산 위로 올라가면서 층층이 만들어진 멋진 장관은 한마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규모가 크지만, 막상 보면 규모에 관한 것보다 멋지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왜 그런 걸까? 그건 녹차밭이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도책의 등고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녹차밭의 풍경은 어찌 보면 아름답긴 하지만 단순반복적인 경치일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이곳에 오면 어떻게 사진을 찍을까? 고민하게 된다.


여행하면서 사진을 찍은 지가 제법 됐지만, 사진 실력은 늘 거기서 거기다. 그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진의 기본을 지키지 못해서다. 사진을 잘 찍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사진은 뺄셈을 잘해야 된다고. 그런데 난 도무지 빼는 게 안 된다. 빼기는커녕 무엇인가를 더 더하려고 고민한다. 그러다 보니 사진 실력은 늘 제자리에서 맴돈다.


녹차밭의 경치를 보고 있으면 무엇을 빼야 한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디를 어떻게 더 넣어서 한 장의 사진으로 다 볼 수 있을까 고민한다. 녹차밭 경치에 빠져 점점 높은 곳으로 올라가면 이 생각은 올라가는 것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커진다. 녹차밭에 외국인들이 많이 보였다. 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단체로 녹차밭을 찾았다. 그들이 삼삼오오 짝지어 걷는 모습은 녹차밭에 새로운 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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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나무는 상록수여서 사계절 푸른 잎을 보여준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아 녹차밭은 사시사철 초록의 푸르름이 가득하다. 계절이 자리바꿈을 시작하면서 녹차밭 주변 나무들도 화사한 봄꽃들을 피워냈다. 그 꽃들은 녹차 나무의 초록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화사하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초록의 녹차 나무와 봄꽃을 피운 나무들이 어우러져 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멋진 경치를 펼쳐놓았다.

4월의 첫날이라 아직은 겨울을 이겨낸 흔적이 가득한 조금은 칙칙한 초록이다. 녹차 나무는 4월 하순부터 어린 새순이 올라오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때는 연하고 밝은 녹색이라 지금과는 같은 듯 다른 녹차밭의 경치를 펼쳐놓을 것이다. 그 경치가 보고 싶고, 사람들이 어린 찻잎을 따는 모습도 보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찻잎 따는 것부터 시작해서 녹차 만드는 것까지 체험해 보고 싶다.


녹차밭을 둘러보고 나서 쉼터에 들렀다. 녹차밭에 온 김에 기념으로 녹차를 샀다. 이전에 왔을 때는 당 걱정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먹는 걸 구경만 했던 녹차 아이스크림도 샀다. 아직은 겨울의 부스러기가 남아 있어 아이스크림에 이가 시렸다. 기분 좋은 쌉싸름함과 함께 부드러운 달콤함이 있어 여행의 피로감을 잠시 밀쳐낼 수 있었다. 또 밀려오는 봄의 기운을 먹는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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