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 여행을 할 때마다 늘 궁금한 게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바다가 지척인 곳에 호수가 있는 게 궁금했다. 강원도 바닷가에는 강릉에 경포호가 있고, 속초에는 영랑호와 청초호가 있다. 그리고 더 위쪽인 고성에는 송지호도 있다. 선입견인지는 몰라도 호수와 바다가 가깝게 있는 게 왠지 어울리지 않고 또 자연스럽지 않게 여겨졌다.
속초는 드나든 횟수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많이 가 본 곳이다. 속초에 영랑호와 청초호가 있다는 사실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딱히 가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나의 잘못된 선입견이 크게 한몫했고, 또 볼 곳이 많은 속초에서 다른 곳에도 있는 호수를 보기 위해 시간을 쓴다는 게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번 속초 여행은 어린 손자와 함께했다. 그렇기에 가 볼 곳이나 가고 싶은 곳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를 간다고 해도 손자의 유모차가 있어서 갈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다. 여행 첫날, 점심으로 물회를 맛있게 먹고 소화도 시킬 겸 산책할 만한 곳을 찾았다.
속초 영랑호는 데크 길이 잘 되어 있어서 유모차도 다니기에 딱 좋을 것 같았다. 도착한 영랑호반길에서 바라본 영랑호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커서 나도 모르게 여행자 마음으로 바뀌면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영랑호반길은 둘레가 7.8km여서 한 바퀴를 돌려면 시간이 꽤 걸리는 거리다.
예전 같으면 호수는 가지 않을 곳이라 궁금한 것도 그때만 지나면 자연스럽게 잊혔다. 이번에는 영랑호를 다녀왔기 때문에 그동안 가지고 있던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인터넷을 뒤졌다. 동해안에 호수가 많은 건 석호(Lagon)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지구에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오르면서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높아졌다. 그 때문에 동해안의 깊은 골짜기나 만(灣)이었던 지역이 바닷물에 잠겼다.
그 이후, 해안선을 따라 흐르는 연안류와 파도에 의해 운반된 모래와 자갈이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만의 입구를 막아 바다와 분리되어 호수가 되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동해안의 호수가 그저 멋있고 아름답다고만 생각되지 않는다. 이 호수들은 최소 1만 년이 넘는 지구의 변화 과정을 거쳐 생겨난 호수여서 그 자연적 가치는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경이롭기까지 하다.
유모차에 손자를 태우고 걸어야 해서 처음부터 영랑호반길을 다 걸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될 수 있으면 그늘진 길만 가볍게 걸을 생각이었다. 영랑호의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높았다. 그 푸른 하늘을 배경 삼아 뭉실뭉실 피어난 뭉게구름이 가을 하늘을 펼쳐놓은 듯했다. 영랑호 저편으로 보이는 설악산과 주변 산들이 호수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이 멋진 경치는 유명한 화가가 캔버스에 그린 작품처럼 보였다.
경치도 좋고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도 좋은데, 문제는 한낮의 찌는 더위였다. 호수라서 한 줄기 바람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그건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푹푹 찌는 무더위는 영랑호는 물론 주변의 모든 것들을 멈추어 세웠다. 더위에 짓눌린 모든 것들은 죽은 듯이 숨죽이고 서있었다. 모든 게 멈춘 영랑호는 AI가 만들어낸 가상의 현실로 보이고, 나는 그 가상 속을 걷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영랑호에는 이름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영랑호라는 이름은 신라 화랑 ‘영랑’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경치 좋은 곳마다 그럴듯한 전설이나 이야기가 있어 그곳의 의미를 더해준다. 그런데 영랑호의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라, 그 유래가 삼국유사에 나온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영랑을 비롯한 네 명의 화랑이 금강산에서 수련하다가 금성(경주)에서 열리는 무술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금성으로 가다가 영랑호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은 영랑호의 빼어난 경치에 빠져 풍류를 즐기고 도를 닦았다고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네 명의 화랑과 영랑호가 등장한다. 이런 걸 보면 영랑호의 빼어난 경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무딘 감성을 탓할 수 없다. 무더운 날씨 탓에 선인들이 그토록 감탄했던 영랑호의 빼어난 경치를 제대로 즐기고 느낄 수가 없었다. 걷기 시작해서 얼마 가지 않아 영랑교 부근에 갔을 때, 영랑호의 침묵과 잔잔함을 깨우는 사람을 발견했다. 영랑호의 수심이 깊은 곳은 8m라고 하는데, 호숫가는 깊지 않은 모양이었다. 영랑교 부근 물속에서 한낮의 그 뜨거운 햇볕을 고스란히 받으면서 무언가를 열심히 잡는 사람이 보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어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그 사람은 물 위에 사각 통을 놓고, 허리를 굽혀 물속에서 무언가를 건져내고 있었다. 미루어 짐작건대 그 사각 통은 민물에서 고둥을 잡을 때 사용하는 것처럼 보여서 고둥을 잡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그 사람이 고둥을 잡건 다른 걸 잡던 그건 중요치 않았다. 모든 게 멈춘 영랑호에서 유일하게 발견한 움직임이어서 그랬는지 별것이 아닌데도 기억에 남았다.
물속에서 일하는 그 사람을 보면서 불현듯 까까머리 중학생 때의 한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중학교에 들어가면 잉크와 펜촉을 끼운 펜대로 필기했다. 볼펜이나 만년필이 흔치 않던 시절이라 잉크와 펜대는 학생들의 필수 학용품이었다. 쉬는 시간이 되면 서너 명이 둘러앉아 물컵에 잉크를 떨어뜨리며 놀았던 기억이 있다.
물컵에 잉크를 떨어뜨리면 잔잔한 수면에 동그스름한 모양이 생겼다가 이내 물속으로 사라지듯 퍼져나갔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잉크가 물속에서 퍼져 나가는 모습을 보는 게 꽤 신기하고 재밌었다. 잔잔한 영랑호에서 일하는 사람의 모습이 물컵에 잉크를 막 떨어뜨렸을 때의 그 둥그스름한 모습처럼 여겨졌다.
영랑호반길을 얼마 걷지 않았지만, 무더운 날씨 속에서 걷는 건 무리였다. 그때 마침 영랑호가 내려다보이는 카페가 있어 피신하듯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에어컨이 쉬지 않고 돌아가는 시원한 카페는 그야말로 천국과 다를 바 없었다. 시원한 카페에서 여유롭게 바라보는 영랑호의 모습은 한낮인데도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계속 정지된 경치만 보아서 그런지 나의 감성과 느낌도 멈추어버렸다. 영랑호를 바라보아도 이젠 아무 느낌이나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니까 그냥 바라볼 뿐이었다. 영랑호는 한 장의 사진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었다. 영랑호를 잠시 밀쳐두고 벙긋벙긋 귀엽게 웃는 손자의 귀여움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