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화석정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얼마 전, 혼자 파주를 여행하면서 감악산 출렁다리에 가고 있었다. 교차로에서 신호대기에 걸려 잠시 멈추어 있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앞에 보이는 이정표를 쳐다보게 되었다. 두세 개의 이정표가 있었는데, 그중의 하나가 화석정을 가리키는 이정표였다. 이정표가 갈색인 걸 보면 화석정은 파주에서 알려진 관광지이거나 문화재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그 이정표를 보는 순간, 한때 정자가 좋아 전국을 다녔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의 좋았던 기억과 함께 잠시 잊고 있었던 정자 여행의 즐거움이 다시 떠올라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출렁다리는 나중에 가고 먼저 화석정으로 갈까?’ 신호가 바뀔 때까지 고민하다가 화석정은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들르기로 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감악산 출렁다리를 구경하면서도 화석정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행여 감악산 출렁다리 경치에 빠져 화석정을 잊을까 싶어 머릿속에 계속 붙잡아 두었던 모양이다. 감악산 출렁다리에서 나올 때는 오후 5시가 훌쩍 넘었다. 해가 긴 여름이라 다행이긴 했지만, 서둘러 찾아오는 어둠에 화석정을 제대로 보지 못할까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 때문에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오른쪽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예상을 하기는 했지만, 화석정에는 겨우 차 한 대만 세워져 있고,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국에 이름난 정자를 가도 사람은 많지 않다. 저마다 멋진 경치를 품고 있는 정자가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하는 게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조용하게 즐길 수 있어 좋은 것도 사실이다.
화석정은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한 번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우스갯소리로 주인공은 늦게 나타나는 법이라고 했는데, 화석정은 차에서 내리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자 양옆에는 수령이 만만치 않게 보이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정자를 호위하듯이 서 있다. 정면에서 보는 화석정의 경치는 그 나무들이 있어 더욱더 멋지고 운치 있게 보였다.
화석정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이다. 화석정은 마루에 작은 방이 없는 형태로 사방이 툭 터져 있다. 입구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화석정 현판이 걸려 있다. 나름 전국의 많은 정자를 가봤지만, 근대사에 굵직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 쓴 정자의 현판은 처음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박 대통령은 역사의 뒤편으로 점점 더 멀어져가고, 정자는 그 세월만큼 세월의 무게를 더해간다.
화석정은 임진강 강가에 지은 조선시대의 정자다. 세종 때, 율곡 이이 선생의 5대 조부가 화석정을 세웠다. 성종 때 증조부인 이의석이 보수했고, 몽암 이숙함이 화석정이라 이름지었다. 화석정은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역사의 인물 율곡 선생 집안에서 세운 정자다. 그러니만큼 화석정에 율곡 선생의 발자취가 빠질 리 없다. 나중에 율곡 선생이 다시 중수해서 여가 때는 물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화석정에서 제자들과 시와 학문을 논했다고 한다.
화석정에는 아이러니한 역사 이야기가 한 토막 있다. 율곡 선생의 10만 양병설은 학창 시절 시험에 빠지지 않고 나왔던 내용이라 지금도 기억한다. 왜구의 침공에 대비해 율곡 선생이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지만, 선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랬던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 갈 때, 한밤중에 강을 건너면서 불을 밝히려고 화석정을 태웠다고 한다. 염치없는 임금이란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 후 화석정은 80년간 빈터로 남아 있다가 율곡 선생의 후손들이 복원했지만, 한국전쟁 때 안타깝게 또 소실되었다. 지금의 화석정은 1966년 파주시 유림이 다시 복원한 것이다. 복원한 것이라 율곡 선생이 사용했을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화석정이 품은 경치만큼은 여전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세월 따라 강산도 수없이 바뀌긴 했지만 말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화석정에 올라가려는 순간, 눈에 거슬리는 걸 보게 되었다. 화석정 안에는 먼저 와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두 여자분이 있었다. 멀찍이 떨어져서 그 사람들을 보았을 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화석정에서 멋진 경치를 구경하면서 캔버스에 그려지는 또 다른 멋진 경치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화석정 마루턱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는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었다. 그런데도 두 여자분은 버젓이 신발을 신고 있었다.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 해도 안내문이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신발을 신고 있는 그들의 몰상식한 행위가 기분을 망쳤다. 정자에 가면 마룻바닥에 앉아 옛 선비들이 그랬을 것처럼 경치를 보면서 여유롭고 한가로운 시간을 즐겨보는 게 정자 여행의 묘미이자 매력이다.
그렇다고 그들처럼 신발을 신고 화석정에 오를 수가 몸을 돌렸다. 화석정 옆에서 길게 이어진 임진강의 경치를 내려다보았다. 그동안 임진강을 몇 번 보았지만, 이렇게 길게 이어져 흐르는 온전한 모습의 임진강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임진강이 이렇게 크고 넓은 지를 오늘에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높은 산들과 대지 사이를 흐르는 임진강의 파란 물줄기는 마치 멈추어 있는 것처럼 흘러갔다. 임진강은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나저나 화석정 덕분에 율곡 선생에 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율곡 선생 하면 강릉 오죽헌이 먼저 떠오른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파주하고 율곡 선생이 어떤 연관이 있나 싶어 고개가 갸우뚱했었다. 알고 보니까, 율곡 선생의 생애와 깊은 관련이 있는 지역은 세 곳이었다.
율곡 선생이 태어난 외가인 강릉 오죽헌,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 그리고 덕수 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 파평면 율곡리이다. 율곡 선생의 호인 율곡이 파주 율곡촌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도 이번에 알게 되었다. 파주에는 율곡 선생은 물론 신사임당과 가족들의 묘소도 있다. 이걸 보면 태어난 강릉도 그렇지만, 성장기와 말년을 보낸 파주가 율곡 선생과는 더 깊은 인연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해가 긴 여름이지만, 그래도 어둠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조금 이르긴 해도 저 멀리에서부터 서서히 땅거미가 밀려온다. 이제 기세가 누그러진 오후 햇살을 막아선 나무 그늘 속으로 어둠의 그림자가 스며든다. 화석정을 뒤로하는 발걸음에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아쉬움이 나를 다시 화석정에 데려다줄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