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하도포구와 별방진

그냥 걷다가 우연히 만난 경치가 더 아름답다

by 레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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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흐르면서 여행의 패턴도 바뀌었다.

한창 여행 다닐 때는 한 군데라도 더 볼 욕심에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땐 그게 여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건 반쪽짜리 여행이었다.

눈으로 보긴 했어도 마음까지 온전하게 즐기지는 못하지 않았나 싶다.

차가 있으니까 이동이 자유롭기는 했지만, 그땐 어느 고장에 가든 하루에 서너 군데씩 둘러보기 일쑤였다.

요즘도 아직 그때 버릇이 남아 가끔 그럴 때가 있지만, 그래도 이젠 의식적으로 천천히 느긋하게 즐기려고 한다.

요즘은 여행지에서 외국인을 만나는 게 다반사다.

어떨 땐 그들의 여행하는 모습이 좋아 보일 때가 있다.

오래전, 양화진에 갔다가 나무 그늘 벤치에서 혼자 한가롭게 책을 읽는 젊은 외국인 남자를 본 적이 있다.

옷차림새와 옆에 놓여 있는 가방을 보면 여행 중인 사람이 틀림없었다.

여행하러 와서 한가롭게 책 읽는 모습이 처음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여유로운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다.

여행한답시고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던 때라 그 모습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때 나도 앞으로 여유롭게 여행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세월을 끌어안을 만큼 끌어안은 이제야 여행에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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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가족들과 제주도를 여행했다.

여행 갈 때 일정을 짜지 않는 편이지만, 제주도에 갈 때는 다르다.

우리나라지만 마음먹는 대로 휭하니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보니까, 알차게 시간을 보내려고 대충이나마 계획을 짠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그동안 제주는 여러 번 다녀왔다.

내륙에 있는 그 어느 곳보다 더 자주 다녀온 곳이다.

그런 만큼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제주 여행지는 거의 다 가보았다.

이런 점도 있지만, 이번에는 귀여운 손자와 함께 여유롭고 편안하게 지내다 올 생각이었다.

그러다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가든지 말든지 그때그때 결정하려고 했다.

이번에 머문 숙소는 제주시 구좌읍에 있었고, 숙소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바다가 있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나면 운동 삼아 구경삼아 해안 길을 걸었다.

처음 와보는 곳이라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적당히 걷다가 되돌아올 생각이었다.

끝없이 펼쳐진 제주 바다는 코발트색과 짙푸른 색이 어우러져 시원하고 아름다웠다.

바닷가에 있는 건물들도 바다 경치의 일부가 되어 경치를 한층 더 풍성하게 해주었다.

무엇보다도 오가는 사람이 없는 한적한 길을 혼자 걷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복작대는 사람들 틈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해변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제주다운 멋스러움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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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여유롭게 경치를 즐기면서 걷다가 만난 곳이 하도 포구였다.

포구에 정박해있는 배들은 잔잔한 파도에 한가롭게 흔들거렸다.

방파제에는 낚싯대를 드리고 여유만만하게 입질을 기다리는 사람도 보였다.

뭐라도 잡힌 게 있나 싶어 가보았지만, 고기 망에는 재수 없게 걸려든 작은 고기 두세 마리가 전부였다.

고기가 잡히는 것과 상관없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한가로운 하도 포구와 잘 어울렸다.

처음 하도 포구에 갔을 때, 길 건너편에 있는 거무스름한 돌로 된 성벽을 보았다.

사실 그때는 그것이 성벽인지도 몰랐고, 또 어떤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있는 시설물인지도 알지 못했다.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을 누군가가 필요해서 더 크고 정교하게 쌓은 것이겠거니 하는 생각에 가보지 않았다.

두 번째 하도 포구에 갔을 때, 그제야 그 성벽이 궁금해서 길을 건넜다.

가까이에서 성벽을 보는 순간, 평범한 시설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성벽은 크고 작은 돌들로 정교하면서도 튼튼하게 쌓았고, 길이도 길었다.

그때 발견한 안내문을 읽어보고 나서야 별방진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된 별방진은 조선 중종 때, 목사 장림이 우도에 자주 침범하는 왜구를 막기 위해 쌓은 성이었다.

성의 둘레는 950m이고, 성벽은 지금껏 보았던 성들의 두께보다 더 두꺼웠다.

여느 성벽에서 볼 수 있는 성가퀴가 없는 것은 특이했다.

예전에 순천을 여행하면서 보았던 순천왜성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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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의 돌은 제주에 많은 거무스름한 현무암이었다.

성벽이 온통 검다 보니까 더욱더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여러 번 제주에 왔지만 이런 성을 구경한 건 처음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문화유산을 보게 되어서 어린 시절에 소풍 가서 보물쪽지를 찾은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숙소에 돌아와 가족에게 자랑하듯이 별방진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큰딸의 반응이 의외였다.

“아빠! 여태 별방진을 몰랐어?”

이미 와봤다고 하기에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다.

별방진은 이름난 여행지도 아니고, 젊은 친구들이 그리 좋아할 만한 곳도 아니라 궁금했다.

큰딸 말에 의하면, 누군가가 유채꽃이 핀 별방진에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렸는데 그 사진이 퍼지면서 젊은 사람들이 사진 찍으려고 많이 찾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별방진에 노란 유채꽃이 피면 성벽과 꽃이 보색이라 꽤 멋진 경치가 펼쳐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SNS의 위력이 대단하다는 걸 새삼 다시 한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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