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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Aug 02. 2020

산사의 고즈넉함에 빠지면 대책이 서지 않는다

산사의 참 멋은 고즈넉함에 있다. 산사라고 해도 이름깨나 알려진 곳은 주말이면 사람들로 복작댄다. 주말의 다른 관광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용한 편이기는 해도 말이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평일, 그것도 오후 느지막한 시간의 산사는 그야말로 고요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태고의 정적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하루해가 길게 드러누운 치악산 구룡사의 넓은 품은 열 달 동안 머물렀던 어머니의 뱃속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다.

    

쏟아지는 뜨거운 햇살에 세상 만물이 다 축 늘어졌다. 깊은 산속에 안겨 있는 산사라고 해서 예외일 수는 없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나무들에 둘러싸여 있기는 해도 산사의 하늘은 뻥 뚫렸다. 그 공간으로 물밀듯이 쏟아지는 햇살에 구룡사는 속수무책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이때다 싶어 구룡사도 한숨 쉬어간다. 들락거리는 사람이라도 많으면 체면상 억지로라도 눈을 뜨고 있을 텐데, 그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대놓고 졸고 있다.

  

세상이 흐물흐물 녹아내려도 시간이라는 녀석은 개의치 않는다. 칼같이 줄을 세운 군복에 반짝반짝 빛나는 군화를 신은 군인처럼 잠시 잠깐도 행진을 멈추지 않는다. 세상이 무너져도 제 할 일을 하고 마는 고지식한 녀석은 세상을 오후의 끄트머리로 몰아간다. 빨갛게 달아올랐던 하루가 서서히 식어간다. 날렵한 하얀 구름으로 가득했던 파란 하늘에 푸르스름한 어둠의 기운이 찾아든다.

  

그제야 세상모르고 졸고 있던 처마 끝의 풍경이 화들짝 깨어난다. 누가 뭐라지도 않았는데 저 혼자 미안했던지 뎅그렁뎅그렁 맑은소리부터 울린다. 졸지 않은 것처럼 시치미를 뚝 떼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그렇게 치악산 구룡사의 하루가 저물기 시작한다.



구룡사에 다시 발을 들이는 게 얼마 만인가. 지인들과 함께 왔던 게 마지막이었으니까 벌써 5~6년이 지났다. 이제는 입에 붙어 버린 말처럼 시간이 참 빨리도 간다. 그때의 기억이 불과 몇 달 전처럼 생생한데 벌써 그렇게 되어버렸다. 늦은 오후 시간이라 구룡사 턱밑까지 차를 몰아간다. 구룡사 가는 길에 황장목 숲길과 원통문이 아깝지만, 곁눈질로 만족한다.

  

널찍한 주차장은 비워놓기 아까워 세워놓은 것처럼 겨우 차 몇 대만 서 있다. 그것을 보면 몇 사람이라도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편해진다. 사람의 물결과 도시의 소음에 깃들여져 있어 갑자기 마주하는 조용함과 혼자라는 것이 익숙지 않다.

 

손가락으로 다 꼽을 수 없는 오랜 세월부터 사천왕문은 당당한 모습으로 구룡사를 지키고 있다. 어느 산사를 가든 사대천왕이 지키는 사천왕문을 볼 수 있다. 규모와 웅장함만을 따진다면 구룡사의 사천왕문은 첫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사대천왕은 보통 큰 덩치가 아니다. 사람을 압도하는 크기에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큰 눈을 잔뜩 부라리고 있어 무섭게 보인다. 어렸을 때, 돌아가신 어머니 손을 잡고 사찰에 들어설 때마다 그 사대천왕이 무서워 슬그머니 어머니 뒤에 숨곤 했다.


구룡사의 사대천왕도 마찬가지이다.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천둥 벼락을 치듯이 큰 목소리로 꾸짖을 태세이다. 사대천왕이 무섭게 보이지만, 표정이 험상궂거나 잔뜩 인상을 쓰고 있지는 않다. 거대한 크기와 근엄한 표정 그리고 툭 불거진 눈망울이 주는 위압감 때문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구룡사의 사대천왕을 보면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근엄한 표정 뒤에 미소와 웃음을 숨기고 있다. 마냥 귀엽기만 한 손자를 놀려주려고 일부러 화난 척하는 할아버지의 장난스러운 모습이 엿보인다. 꾹 참고 있는 웃음을 터트리기 일보 직전이다. 어쩌면 사대천왕은 긴장한 모습으로 여행자가 지나가고 나면 자기들끼리 웃음을 터트릴지도 모른다.  



사천왕문을 지나면 오르막 계단 위에 보광루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두 팔을 허리에 올리고 눈길은 15도 상향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예전에 검문소 헌병을 보는 듯하다. 검문소에 도착하면 빳빳하게 주름잡은 군복에 파이버를 쓴 헌병이 딱딱한 표정으로 버스에 오른다. 무표정하게 경례를 한 다음,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하고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을 살피던 그때 그 헌병이 떠오른다.

 

검문을 통과했다고 해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보광루를 지날 수는 없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헌병과 눈길을 마주치지 못했듯이 고개를 숙여 보광루 밑을 지난다. 그제야 대웅전이 두 팔을 벌려 환하게 웃으며 달려온다. 시골집 부모님이 오랜만에 찾아온 자식을 품듯이 포근하게 끌어 앉는다. 등을 토닥여주는 따스한 손길에 사대천왕과 보광루에 눌렸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진다.

  

대웅전 앞문이 활짝 열려있다.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은 부처님이 반가운 눈길을 보낸다. 그 눈길에서 안부를 묻는다. ‘오랜만에 왔구먼. 한데 오늘은 어찌 이리 늦은 시간에 왔는가.’  구룡사는 말할 수 없이 고요하고 아늑하다. 뒷산에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듯하다. 그 고요함을 깨뜨릴 배짱이 없어 내딛는 발걸음이 마냥 조심스럽다. 가끔 정적을 깨뜨리는 맑디맑은 풍경소리가 있어 구룡사가 깨어 있음을 느낀다.


예전에 두어 번 발길이 끊어진 산사에서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다 마찬가지로 몸과 마음이 고요와 평온의 바닷속으로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 느낌을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렵다. 구구절절한 말보다 그저 참 좋다는 말 한마디가 제격이다. 지금의 이 고요함은 순결하다. 그 순결한 고요함에 말과 글을 갖다 붙이는 면 오히려 불결해진다. 지금 같을 때는 불경 소리나 목탁 소리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사찰 건물과 조금 떨어져 있는 조사전에 오늘따라 눈길이 더 간다. 올 때마다 보았던 건물인데 자석에 끌리듯 자꾸 눈길이 간다. 울창한 나무숲에 둘러싸여 있는 조사전은 숱한 역사의 이야기와 풀리지 않는 비밀을 간직한 금단의 구역으로 보인다. 언제나 닫혀 있는 빛바랜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곳에는 지금의 현실이 아닌 아득한 세월 저편의 과거가 있을 것만 같다. 아니 그 세월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는 비밀의 문이 거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조사전 밑으로 구룡사를 횡으로 가로지르는 길이 있다. 그 길 끝에서 보는 구룡사 경치를 최고로 꼽는다. 구룡사의 무게를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는 돌 축대 위로 설선당, 종각, 보광루와 연화정이 차례로 서 있는 그 모습이 참으로 멋스럽다.

늘어선 건물들이 적나라하게 보이면 그 멋이 반감될 텐데, 은근하게 옆모습을 보여 더 아름답다. 거기에 흘러간 세월을 부둥켜안았고, 거북하지 않은 무게감까지 보태져 우리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쯤에서 구룡사에 얽힌 이야기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구룡사는 풍수적으로 좋은 말은 다 안고 있다. 천년이 지난 신령스러운 거북이 연꽃을 토하고 있고, 영험한 아홉 바다의 용이 구름을 풀어놓은 형상이라고 한다. 거북이 어디 있고, 용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구룡사가 얼마나 좋은 터에 자리 잡았는지는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사찰에 전해 내려오는 묵은 전설이 없을 리 없다. 구룡사에는 의상대사와 아홉 용의 전설이 있다. 그 이야기를 다 하려면 너무 길다. 대신에 절 이름에 얽힌 이야기는 알아두면 여행이 더욱 풍요로워진다. 구룡사의 “구”를 아홉 구(九)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거북 구(龜)를 쓴다. 원래는 아홉 구(九)였는데, 거북 구(龜)로 바뀌었다. 거기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번창했던 구룡사가 몰락한 것을 보고 한 스님이 찾아왔다. 스님은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에 절이 흥하지 못하니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버리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앴는데 절이 좋아지기는커녕 거꾸로 절 문을 닫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도승 한 분이 찾아와 거북바위가 절의 운을 지켜왔는데, 그것을 쪼개 없애는 바람에 혈맥이 끊어져 운이 막혔다고 했다. 그때부터 죽은 거북이를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거북 구(龜)로 바꾸어 썼다고 한다. 지금까지 구룡사가 자리를 지키며 후손들에게 큰 문화재로 남겨진 것을 보면 거북 “구” 자로 바꾼 효험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구룡사의 또 하나 자랑거리인 거대한 은행나무 밑에 자리를 잡는다. 푸르스름한 어둠의 기운이 발목을 휘어 감는다. 그때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귓가를 간질인다. 그 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맑아진다. 이젠 가야 할 시간인데 몸이 애써 모른척한다. 이러다가 이대로 구룡사에 주저앉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하긴 영화에서는 이럴 때, 멀쩡한 차가 꼭 고장이 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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