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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Oct 04. 2022

팔괘정에서 느닷없이 외할머니가 생각났다


우암 송시열 선생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역사의 인물이다. 당대는 물론 조선 시대를 통틀어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학자이자 문신이다. 논산시 강경읍에 송시열 선생이 지은 팔괘정(八卦亭)이 있다. 옛 정자들을 보면 조금은 거창하고 심오한 뜻을 품은 이름을 갖고 있다. 팔괘정은 정자를 지을 때, 창살 무늬를 팔괘로 꾸며 팔괘정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시대를 대표하는 대학자가 지은 이름치고는 단순 명쾌해서 더 관심이 간다.


지구온난화 영향으로 전국에 기록적인 비가 내렸다. 나라 안 곳곳에서 크고 작은 피해가 발생했다. 이렇게 퍼붓듯이 쏟아지는 비를 보면 지금도 문제지만,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인제 그만 왔으면 좋겠는데, 무슨 불만이 그리도 많은지 팔괘정을 보러 논산 가는 길에 또 비가 내린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폭우가 아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비만 내리면 걱정부터 앞선다. 


널찍한 주차장은 날씨 때문인지 텅 비어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곳에 도착하자 굵은 빗줄기가 소강상태를 보이면서 보슬비로 바뀐다. 우산을 쓰고 주차장 뒤편에 있는 황산 근린공원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왼쪽으로 팔괘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자뿐만 아니라 어느 여행지를 가든 목적지에 도착하면 가벼운 흥분과 함께 기대감이 한껏 높아진다. 


그런데 팔괘정을 처음 보는 순간은 흥분되기보다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팔괘정은 그동안 보았던 정자들과 영 다른 모습이다. 대부분 정자는 사방이 툭 터져 있는 시원한 모습이다. 오기 전에 팔괘정에 대한 자료를 미리 찾아봤다. 자료에는 팔괘정이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대청마루를 가린 문들이 모두 닫혀 있어 정자처럼 보이지 않는다. 정자라기보다 그냥 평범한 옛 건물처럼 보인다. 



머릿속에 있는 정자의 모습과 다르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팔괘정은 마루가 툭 터져 있지 않고 문으로 가려져 있다. 필요에 따라 문을 여닫도록 했다. 그건 아마도 팔괘정이 학문을 갈고닦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계절에 따른 기능적인 다른 의도도 있었겠지만, 공부할 때는 학문 탐구에 집중할 수 있게 문을 닫을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싶다. 자연을 벗 삼아 쉬거나 사람들과 교류의 장으로 사용할 때는 그 문들을 모두 열어 자연의 풍광을 끌어들였을 게 틀림없다. 


팔괘정은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 선생을 추모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팔괘정에서 150여m 떨어진 곳에 임리정이 있다. 임리정은 송시열 선생의 스승인 김장생 선생이 후학을 가르치던 곳으로 건물 모습이 팔괘정과 비슷하다. 송시열 선생이 스승과 가까이 있고 싶어 임리정과 가까운 곳에 팔괘정을 지었다고 한다. 건물의 용도가 같고, 스승에 대한 각별한 사모의 정이 있어 두 정자가 닮은 것 같다.

 

학문을 갈고닦는 공간이지만, 여느 정자와 마찬가지로 팔괘정도 멋진 경치를 품고 있다. 지금은 대나무 숲에 가려져 그 너머로 봐야 하지만 팔괘정 저 앞으로 금강이 흐른다. 유유히 흐르는 금강의 경치를 보고 있으면 팔괘정을 왜 이곳에 지었는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팔괘정이라 지은 이름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창문을 유심히 살폈다. 무지한 여행자의 눈에는 한옥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띠살무늬 문이라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 이걸 보고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른다고 하는가 보다. 팔괘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당연한 결과다. 그나마 특이하게 보이는 건 벽에 있는 작은 들창문 밑에 머름이다. 


머름은 한옥의 창 아래 설치된 높은 문지방이다. 높이가 30~50Cm 정도로 사람이 팔을 걸쳤을 때 가장 편안한 높이다. 창을 아름답게 꾸미는 효과와 함께 사생활 보호 역할을 한다. 큰 창문에서는 많이 보았지만, 벽에 붙어 있는 작은 창문 밑에 있는 건 처음이다. 기억력이 예전 같지 않아 정말 처음 보는 것인지 보았는데도 까맣게 잊었는지는 알 수 없다. 팔괘정에서 처음이라 느껴지니까 그냥 처음이라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또 그렇게 해서 새로운 걸 보는 즐거움이 있으니 이리저리 따질 게 없다.

 


팔괘정의 목재는 단청을 입히지 않아 지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굵직한 기둥은 쩍 하니 갈라져 있고, 그밖에 다른 부분들도 크고 작게 갈라져 있다. 보기에 따라 위태롭기도 하지만 딱히 걱정할 건 없다. 크고 적게 벌어진 틈은 그동안 거쳐 간 세월이 촘촘히 메우고 있다. 그렇게 쌓인 세월이 있어 인간사에 시간의 개념이 없어지기 전에는 끄떡없을 것 같다.

 

지나온 세월의 거친 비바람을 견뎌낸 모습이 옛 정자의 진정한 멋이고 매력이다. 거기에 정자를 찾는 즐거움과 재미와 흥취가 있다. 억지로 보태거나 덧씌우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때 정자가 더욱더 아름답다. 그런 만큼 정자에서 세월의 시간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게 정자 여행의 참맛이고 멋이다. 


거칠거칠하고 이리저리 갈라진 정자의 회색빛 목재를 보면서 돌아가신 외할머니 생각이 났다. 정자 여행을 많이 했지만, 정자에서 지난 추억이 떠오른 건 처음이다. 옛 정자들이 품은 세월의 무게가 무겁고 커서 짧고 가벼운 세월을 살은 내가 정자에서 찾을 만한 추억의 건더기는 없었다. 외할머니를 떠올릴 수 있었던 건 한참 모자라는 내 삶의 길이에 외할머니의 자유로운 영혼의 시간이 더해졌기 때문이리라.


친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그분에 대한 기억이나 추억은 남아 있지 않다. 시골에 사셨던 외할머니는 어렸을 때 몇 번 서울집에 오셨다. 집에 오시면 어린 나를 늘 안아 주셨고, 때론 주무실 때 같이 자자고 나를 안으셨다. 갑갑해서 외할머니의 품을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그대로 품에 안겨 있었다.

 

쉽게 잠들지 못한 나는 외할머니 품에 안겨 외할머니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뼈에 가죽만 붙은 앙상한 외할머니 손은 셀 수 없이 갈라져 있었고 또 거칠었다. 그때는 외할머니 손이 왜 그렇게 마르고 거친지 몰랐다. 외할머니 품에 안겨 있으면 쿰쿰한 외할머니만의 체취가 느껴졌다. 어머니의 품에서 나지 않는 외할머니의 체취였다. 그런 외할머니의 체취가 싫지 않았다. 그동안 기억 속에서 잠자고 있던 외할머니의 거친 손과 체취가 팔괘정에서 되살아났다.

 


팔괘정의 모든 문이 닫혀 있어 구경하는 즐거움이 반감된 건 사실이다. 그 아쉬움을 외할머니의 추억으로 대신 메웠다.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팔괘정을 두고 빙빙 돌아가며 보고, 뒤 구릉으로 올라가서도 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보이는 건 겉모습뿐이라 구경하는 데 오래 걸릴 건 없다. 보면 볼수록 문이 닫혀 있는 아쉬움만 커졌다.

 

팔괘정 옆으로 나무숲과 어우러진 거대한 암벽이 있다. 그 암벽에는 송시열 선생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청초암(靑草岩)”과 “몽괘벽(夢挂壁)” 이란 글씨가 방금 새겨넣은 것처럼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청초암은 가로로 새겨졌고, 몽괘벽은 세로로 새겨져 있다. 그 글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 사전을 찾아봤다. 사전으로 글자의 뜻은 알았지만, 어떤 의미로 그 글을 새겼는지까지는 알지 못한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다. 가지 말라고 훼방을 놓는 것인지 다시 빗줄기가 굵어졌다. 안 그래도 팔괘정을 속속들이 보지 못한 아쉬움에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결국 팔괘정 쪽마루에 엉덩이를 내려놓는다. 막상 앉으려니까 조심스럽다. 엉덩이 밑에서 삐걱대는 작은 소리가 들렸으면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오랜 세월을 견뎌온 팔괘정은 여행자를 가볍게 받아냈다.


쪽마루에 앉은 느낌이 전혀 딱딱하지 않다. 폭신하다고 하면 그건 과장이지만, 그렇다고 딱딱하게만 느껴지는 건 절대 아니다. 단단했던 목재가 길고 긴 세월을 거치면서 본성이 많이 부드러워진 모양이다. 사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고요함을 깨뜨리는 소음은 물론 인기척도 없다. 쪽마루를 차지하고 있는 내가 팔괘정의 주인이 된 듯하다.


앉기는 했어도 딱히 할 일은 없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바라본다. 내리는 비가 커튼이라도 친 것처럼 눈앞이 뿌옇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머릿속이 텅 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모른다. 그때 어디선가 정적을 깨뜨리며 꾸르륵~~ 꾸르륵~~ 하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빗속으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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