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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드산 Oct 31. 2023

덕수궁 돌담길

가을이 오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이미 와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까 가을의 기준이 궁금하다. 여태껏 그런 의문 없이 만나고 보낸 그 가을을 두고 올핸 별생각이 다 한다. 언제부터 가을이라는 명확한 기준은 모호하지만, 여름 내내 보았던 자연의 느낌과 분위기가 달라진 건 분명하다. 아직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가을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한번 물꼬가 터지면 가을은 순식간에 밀려온다. 

계절을 말하기가 애매모호한 10월도 하순에 들어섰다. 눈 부신 햇살이 가득한 휴일을 맞아 여행의 동지이자 동반자인 지인들과 정동길을 걸었다. 딱히 가을을 염두에 두고 걸은 건 아니지만 생각지 않게 가을맞이가 되었다. 요즘은 덕수궁 돌담길보다 정동길로 더 많이 불리는 것 같다. 정동길이면 어떻고 덕수궁 돌담길이면 어떨까 싶지만, 6~70년대를 거쳐온 내게는 덕수궁 돌담길이 더 익숙하고 정겹다. 

그나저나 덕수궁 돌담길을 언제 오고 처음인지 모르겠다. 먼지 가득한 기억의 창고를 이리저리 헤집어 보아도 도무지 흔적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다. 언제 왔었는지의 기억은 야속하게 지워졌지만, 그 마지막도 분명 가을이었을 건 분명하다. 지나온 삶의 시간과 추억 속에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나 가을에 멈추어 있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덕수궁 돌담길은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하다. 돌담길에 들어서면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대도시 서울 한복판에 있는 공간이라는 게 믿기지 않는다. 시청광장의 시끌벅적한 도시 소음도 돌담길에서는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 어느 곳으로 공간 이동한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진다.

지인들과 경복궁에서 출발해 시끄러운 대로 뒤에 있는 한적한 길을 걸어 정동길에 들어섰다. 지금은 경향신문사 건물이라고 하지만, 기억 속에는 MBC 정동 사옥으로 남아 있다. 경향신문사에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그 기억은 바뀌지 않을 것 같다. 그 기억이 바뀌면 추억도 변할 것 같아 굳이 바꿀 마음이 없다. 가을 정취를 즐기며 정동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다. 멋진 추억을 그려가는 젊은 사람들부터 옛 추억을 꺼내든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정동길에 있는 역사적인 건물들도 지나칠 수 없는 볼거리이지만, 가을과 어울리는 분위기와 느낌이 있어 정동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길을 걸으면 기억 속에서 잠들어 있던 옛 추억들이 앞다투어 떠오른다. 공짜라고 넙죽넙죽 받아먹은 세월이 차곡차곡 싸여 있어 추억의 시간이 참 빨리도 흘러간 게 실감 난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덕수궁 돌담길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정사각형 타일을 정교하게 붙여 놓은 것처럼 보이는 돌담과 그 위에 내려앉듯이 얹힌 기와의 모습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옛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정겹다. 돌담 너머에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서 고개를 쭉 뽑아 올린 덕수궁의 나무들도 반갑다. 눈에 익은 모습이지만. 너무도 오랜만이라 반가운 건 물론 설레고 흥분이 된다. 

덕수궁 돌담길은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거리다. 누구나 한 번쯤 걸어보고 싶은 곳이고, 또 추억을 새겨 놓고 싶은 길이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서 최우수상을 차지하기도 했고. 낙엽을 쓸지 않는 길로도 지정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낙엽을 쓸지 않는 길로 지정된 게 무척이나 반갑다. 이걸 보면 덕수궁 돌담길은 예나 지금이나 유난히 가을과 어울리는 멋진 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차분한 분위기의 돌담길에서 버스킹을 하고 있다. 부드러운 기타 선율에 맞추어 나지막이 부르는 노랫소리가 가을 분위기를 한층 더 살려준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노래에 빠져본다. 노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따스한 감성이 넘친다.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도시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이 아니라, 여유와 감성이 차고 넘치는 모습이다. 노래도 좋고, 노래를 듣는 사람들의 평온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역시 즐겁다. 덕분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가슴이 감성으로 촉촉하게 젖는다. 

한 곡의 노래가 끝난 다음 다시 돌담길을 걷는다.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따로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라 될 수 있는 대로 천천히 걷는다. 돌담길의 길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어 지금의 이 즐거움과 느낌 그리고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누리고 싶다. 

돌담길을 걷는 사람 중에는 연인들도 많다. 그간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다 보니까 예전 돌담길에 얽힌 슬픈 소문도 세월과 함께 쓸려간 모양이다. 예전에는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오래 못 가 헤어진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때는 돌담길 걷는 연인을 보기 어려웠다. 친구끼리 아니면 남자나 여자나 혼자 걷는 사람이 많았다.

코트 깃을 세우고 혼자 걷던 사람은 뒹구는 낙엽을 보면서 헤어진 사랑의 슬픔과 아픔을 달랬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쓸쓸한 가을의 고독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 돌담길을 걷는 사람들의 모습은 예전과 다르다. 다들 즐거운 모습이다. 그렇긴 해도 그 즐거움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 차분하게 갈무리한 모습이다. 이젠 덕수궁 돌담길의 소문도 바뀌어야 할 것 같다. 연인이 이 길을 걸으면 사랑이 더 깊어진다고…

성급하게 떨어진 낙엽이 보도 위를 뒹군다. 뒹구는 낙엽이 가을의 정취와 분위기가 한껏 끌어올린다. 어디서 떨어졌을까 싶어 주변의 나무들을 살펴본다. 까치발을 하고 덕수궁 돌담 위로 고개를 내민 나무들의 윗부분은 주황빛으로 곱게 물들었다. 참으로 예쁘고 아름답다, 이 가을의 나뭇잎은 왜 이리 예쁘게 변하는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땅바닥에 나뒹굴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체념과 분노와 안타까움을 역으로 예쁘게 표현하는 걸까. 아니면 기왕 떠날 바에 마지막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싶은 걸까. 

촉촉하게 젖어 드는 가을 정취 속에 감미로운 바이올린 소리가 더해진다. 어떤 곡인지는 모르지만, 가을과 돌담길 분위기에 어울리는 바이올린 선율에 다시 또 발걸음을 멈춘다. 다른 계절도 아닌 가을 속 덕수궁 돌담길을 배경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젊은 연주자의 모습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다. 이름 모를 곡이 끝나고 귀에 익은 선율이 흘러나온다. 곡의 제목은 모르지만, 아는 노래라 듣는 즐거움이 더해진다. 안 그래도 한껏 오른 감성에 바이올린 선율까지 보태지니 넘치는 감성을 어찌할 줄 모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언제 감성이 가장 풍부했을까? 아마 고등학교 다닐 때가 아니었나 싶다. 차오르는 감성을 주체하지 못해 가을이면 친구와 함께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친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추억은 가슴 따스한 한 장의 감성 사진이다, 지금처럼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핸드폰이 있었으면 그때의 어설픈 모습이 한 장쯤 남았을 텐데 아쉽다. 

그때의 순진했던 까까머리가 어느새 시니어가 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드는 세월을 살다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때는 지금의 내 모습을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지만, 시간 속에 갇혀 언제고 그대로 머물러 있을 줄 알았다. 그런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세월은 이 자리에 나를 내려놓았다, 이게 아닌데 싶지만, 돌아갈 수 있는 길은 이미 끊어져 있다. 인생의 길은 그저 앞으로 갈 수밖에 없다. 

앞으로 가는 훗날의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까까머리 때는 지금의 내 모습을 상상하지 못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모습은 어렴풋이 그려진다. 발이 파묻힐 정도로 낙엽이 수북하게 쌓여 있는 날, 다시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싶다. 이젠 떠나간 사랑의 아픔을 곱씹을 것도 없고, 또 다른 사랑의 인연을 맺을 것도 없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사랑보다 따스한 추억과 감성을 만나고 싶다. 발길에 차이는 낙엽이 잊고 있던 어느 추억을 끄집어내 줄지 궁금하다. 아무래도 올해는 가을을 타려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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